금관총/ 대릉원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
오늘은 경주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쪽샘지구 임시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위치상 가장 북쪽에 있는 금관총과 봉황대를 시작으로 남쪽 끝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천천히 걸었다. 산책하기에 좋은 따뜻한 가을 날씨였다.
내물 마립간에 이르러 김씨가 왕권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김씨 왕조의 시조는 김알지이지만, 그는 왕위에 오르지 않았고,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제13대 미추 이사금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이 죽은 후 '대릉'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초기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의 호칭으로 불렀으며, 내물왕부터 자비왕까지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지증왕 대에 이르러 ‘왕’이라는 칭호와 ‘신라’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정착되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왕의 시신을 화장하여 교외에 석관묘로 안치하는 장례 방식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대릉원 일대의 고분들은 주로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는 신라의 고유한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도 등장하였다. 대릉원을 산책하며 어느 것이 이 다섯 마립간과 지증왕의 무덤일지 상상해 보기로 했다. 먼저, 다섯 마립간의 이름을 암기하자. 내가 기억한 방식은, "내물(내물왕)받고 실성(실성왕)해서 눌렀(눌지왕)더니 자비(자비왕)를 구해서 소지섭(소지왕)이 되었다." 아들은 소지섭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재밌다며 따라 외웠다.
신라 초기에는 박씨와 석씨 중심으로 왕위가 계승되었지만, 내물 마립간 이후부터는 김씨의 계승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함께 김알지 신화, 미추왕 신화, 대릉원의 대형 고분들이 등장하면서 김씨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린 시절에는 대릉원의 많은 고분들이 천년 왕조의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 지역의 고분 대부분은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해당 시기의 왕은 단 6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곳의 모든 고분이 왕의 무덤인 것은 아니다.
또한 금관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왕의 무덤인 것도 아니다. 금관이 발견된 고분 중 하나인 금령총은 금방울 장난감이 함께 출토되어 ‘금령총’이라 불리며, 금관의 크기로 보아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서봉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확인되었지만, 마립간 시기에는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왕의 무덤은 아니다. 결국 대릉원의 고분들은 왕을 중심으로 왕비, 왕자·공주, 귀족들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금관총은 최초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이로 인해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 고분의 발굴은 일제강점기 시기, 매우 허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발굴 당시 도면이나 사진 같은 기본적인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체계적인 조사 없이 비전문가들이 유물을 부대에 쓸어 담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유물이 훼손되거나, 원형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를 보존 처리하는 중, 칼날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라 고분에서 확인된 최초의 문자 기록으로,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어 2015년 금관총의 재발굴 과정에서는 또 다른 칼에서 ‘이사지왕도(爾斯智王刀)’라는 문구가 확인되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세 자루의 칼 중 두 자루에 같은 인명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시기 마립간 중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없다. 다만, 표기 방식의 차이, 사료의 부족 등을 고려할 때, 내물왕이나 실성왕 등 동시기 마립간 중 한 명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여기서 사용된 ‘왕’이라는 호칭이 반드시 군주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피장자가 아니라, 무덤에 유물을 하사한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국 금관총의 실제 주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피장자가 여성일 가능성도 있으며, 인근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거대한 봉황대가 마립간의 무덤이라면, 금관총은 그에 딸린 가족 무덤일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굴 결과는,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방식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는 단순히 돌을 쌓은 구조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먼저 나무로 틀을 세운 뒤 그 사이에 돌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러한 최근 연구와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금관총은 보존 전시 공간으로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시관은 비교적 최근에 조성되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일부 방문객들은 천마총으로 착각하고 찾기도 했다.
전시관 입구에서는 일제강점기의 허술한 발굴 과정과 그로 인해 이루어진 재발굴의 경과를 다룬 도입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내부는 발굴 당시의 고분 구조를 최대한 복원해 구성되었으며, 천장도 실제 고분의 높이를 반영해 설계되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깔끔하게 조성된 전시 공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한 무덤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통해 고분 조성이 단순한 작업이 아닌, 정교한 기술과 막대한 자원, 그리고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대규모 공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무덤 공사를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관 옆에는 신라고분정보센터가 함께 운영되고 있어 금관총과 연계해 관람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보다 상세한 고분 발굴 정보와 함께 다양한 체험 전시를 할 수 있다.
금관총을 지나 걸으면 작은 언덕 같은 봉황대를 만날 수 있다. 봉황대는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봉황대’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다.
봉황대를 중심으로 중간 규모의 고분들이 주변에 골고루 분포해 있다. 이 일대는 신라 왕족들의 묘역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많은 유물들이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신라시대 금관은 총 여섯 점이 확인되었다. 이 중 교동 금관을 제외한 다섯 점—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황남대총, 천마총—모두 이 대릉원 일대에서 출토되었다. 교동 금관까지 포함하면, 신라 고분에서 확인된 금관 여섯 점 모두가 경주 지역에서 나왔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이 대릉원 인근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왕족 중심의 핵심 묘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옆 금령총에서는 금방울 장난감이 함께 출토되어, 어린 왕자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재는 발굴 후 주변 지형보다 약간 높고 평평하게 조성해두어, 고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그날은 금령총 앞에서 작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금령총 바로 옆에는 식리총이 인접해 있다.
만약 봉황대가 실제로 마립간의 무덤이라면, 그 주변에 자리한 서봉총, 금관총, 식리총 등은 왕비나 왕자 등 왕족 가족의 무덤이었을 가능성도 상상해볼 수 있다.
도로를 건너면 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 등 대형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대릉원 핵심 구역이 나온다. 이곳은 부지가 넓고 고분 간의 간격도 비교적 가까워, 고분군을 따라 걸으며 관람하기에 좋다. 대릉원 내부에는 안내 지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활용하면 걸으면서 각 고분의 이름과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매우 유용하다.
‘다섯 마립간(지증왕을 포함하면 여섯)의 무덤은 어디일까’ 상상하며 걷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첨성대 주변에 내물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이 따로 존재하지만, 황남대총이 내물왕의 무덤일 가능성도 제기되어 왔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으로 구성된 거대한 쌍분으로, 각각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북분에서 신라 금관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금관이 출토되었고, 허리띠에는 ‘부인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며, 다양한 여성용 유물이 함께 나와 여성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반면, 왕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남분에서는 금관이 아닌 금동관이 출토되어 다소 의아함을 주었다. 마립간 시기에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비의 무덤에서는 금관이, 왕의 무덤에서는 금동관이 나온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우리는 왕관이면 당연히 금관이라고 생각했지만, 신라 시대 금관의 사용은 이와 달랐을지도 모른다.
또한 금관이 발굴될 당시, 머리띠 부분이 피장자의 머리가 아닌 턱 부근에서 발견된 점도 특징적이다. 금관이 실제로 사용되었다가 사후에 데드마스크로 활용되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데드마스크 용도로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황남대총 뒤편, 두 개의 봉분 사이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유명한 황남대총 포토존이다. 늘 사진을 찍으려는 방문객들로 긴 줄이 생기는 곳이기도 하다.
김씨 마립간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이를 과시하기 위해 대형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보다 실용적인 이유로 고분의 크기는 점차 작아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초기 마립간 시기인 내물·실성·눌지 마립간의 무덤은 대형 고분일 가능성이 높고, 이후의 자비·소지·지증왕 시기의 고분은 상대적으로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황남대총이나 봉황대는 내물·실성·눌지 중 한 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며, 규모가 더 작은 천마총은 자비·소지·지증왕의 무덤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릉원을 따라 걷다 보면 미추왕릉을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다른 고분들과 달리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띈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로, 오늘날에도 경주 김씨 문중에서 매년 제례를 올리고 있다.
대릉원과 첨성대를 지나 국립경주박물관까지 걸었다. 도보로 이동하기에 다소 멀지만,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과는 달리,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 등 여러 채의 아담한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외에는 다양한 불교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 공간을 지나면 곧 성덕대왕신종을 만나게 된다. 크고 아름다운 이 종은 '에밀레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경덕왕 때 제작을 시작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를 겪은 끝에, 혜공왕 때 완성되었다. 이 종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는 봉황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겨오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특히 종을 매다는 작업에서 현대 기술로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신라 시대에 사용되던 쇠막대를 가져와 설치했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거대하면서 얇고 기포가 없는 청동 주조 기술이 필요하며, 표면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한 현대 기술로도 이런 음색을 내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현재는 보존을 위해 종을 직접 타종은 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마다 녹음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잠시 기다려 종소리를 감상한 뒤, 전시실로 이동했다.
신라역사관은 선사 시대인 석기시대부터 시작해 신라 전 시기를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문화재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방문한 시간과 맞지 않아 듣지는 못했다. 대신 아이는 미리 준비해 온 헤드셋으로 전시마다 마련된 QR코드를 통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관람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아이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유물 목록을 정리해 왔고, 그 목록을 따라 하나하나 찾아보며 집중해 전시를 감상했다.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수막새가 인상 깊었다. 일반적인 기와는 틀에 찍어 만들지만, 이 수막새는 수작업으로 정성스럽게 제작된 것이다. 수막새는 지붕 끝 수키와를 막는 기와로, 그중 얼굴이 새겨진 수막새는 매우 독특한 사례다.
황남대총, 금관총, 천마총 등 주요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아이가 기대했던 천마총 금관 장식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여 전시 중이라 전시실에서 볼 수 없었다. 속상해하던 아이는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했고, 우리 가족은 또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해야 할 것 같다. 원래 자주 갔었는데 올해 여름부터 관람객이 늘어서 방문이 쉽지 않다.
또한 유물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는 3A관이 휴관 중이어서 아이의 실망이 컸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APEC 회의를 맞아 신라 금관 특별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여섯 개의 금관이 한자리에 모이는 첫 전시라고 하니, 그 준비로 인해 휴관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는 전시가 열릴 때 다시 경주에 오자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나 역시 아쉬움이 남았다.
현재 출토된 신라의 금관은 총 여섯 개이다. 각 금관마다 독특한 특징과 발굴 배경을 가지고 있어 신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별전을 못 본 아쉬운 마음에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교동 금관은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물품으로, 가장 단순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 초기 금관으로 추정된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여섯 개 중 가장 화려하다. 머리띠 부분에 드리운 장식이 양쪽으로 세 줄씩 있으며, 여성의 금관으로 확인되고 있다.
금령총 금관은 금방울 장난감이 함께 출토되어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록색 곡옥이 없고 크기도 작은 것이 특징이다.
서봉총은 발굴에 스웨덴 왕자가 참여했고 금관에 봉황 장식이 있어서 '서봉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봉총 금관의 특징은 가느다란 띠가 가로질러 있다는 점이며, 황남대총 북분과 마찬가지로 여성 무덤으로 확인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천마총과 금관총 구분이 어려운데,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세 개면 금관총, 네 개면 천마총으로 구분한다. 황남대총과 서봉총 금관은 여성용, 금령총은 왕자용이니, 금관총과 천마총만 마립간의 금관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이차돈 순교비가 눈에 띈다. 시간대별로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비석 위에 영상으로 투사되어, 정적인 순교비가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미륵여래삼존상은 ‘삼화령 아기부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4등신의 어린아이 같은 비례를 지녀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귀여운 매력을 지닌다. 사진으로는 여러 번 보았지만 실물은 처음이라 더욱 인상 깊었고, 신라미술관에서 가장 정감 가는 조각이었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거대한 치미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크기만으로도 당시 건축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 보니 기록 속 ‘황룡사 9층 목탑’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어서 최근에 건립한 신라천년보고, 영남권 대표 오픈형 수장고를 방문했다. 박물관 뒷편으로 이어진 ‘옥돌교’를 건너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신라천년보고는 실질적인 수장고 내부를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고, 1층에 조성된 전시 공간이 관람의 중심이었다. 비교하자면, 공주에서 관람한 충청권 오픈형 수장고는 보다 큰 규모로 내부 구조까지 잘 볼 수 있었기에, 이번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시대별로 정리된 수막새 코너이다. 기와 중 길쭉한 것은 수키와, 넓적한 것은 암키와인데, 수막새는 수키와의 끝을 막는 장식용 기와이고, 암막새는 암키와의 끝을 마감한다. 수막새에 새겨진 무늬와 패턴은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등 각 시대와 문화를 구분하는 단서가 된다.
야외 마당에는 목이 없는 불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분황사 발굴 당시 출토된 석불들로 한결같이 머리가 잘려 있었다고 한다. 석불의 머리가 없어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약한 부분인 목이 굴러 떨어졌을수도 있고, 전쟁에 따른 파괴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태국 아유타야 유적지에서 보았던 목이 잘린 불상들이 떠올라 흥미로웠다.
박물관이 문을 닫는 5시에 나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동궁과 월지로 이동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거의 이 만 보를 걸어 매우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신라 왕궁의 동쪽에 위치했던 별궁으로, 태자가 머물던 장소이다. 과거에는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으며, 지금은 경주의 대표적인 야경 명소가 되었다.
물 위로 비치는 전각의 그림자와 조명이 어우러져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사실 낮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물이 그리 맑지 않고 복원된 건축물도 다소 조악하여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여기를 밤에 와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