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불국사/ 문무대왕릉/ 감은사지
요즘 경주에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외국인 방문이 늘었고, 황리단길이나 테마파크 등으로 젊은 층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추석 연휴라 더 붐빌 것으로 예상되어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그중에서도 방문이 가장 까다롭다고 알려진 석굴암을 가장 먼저 보기로 했다.
석굴암은 구불구불하고 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닿을 수 있다. 평소에도 교통이 혼잡한 구간인데, 최근 관광객이 많아지며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추석 연휴라 사람도 유난히 많았다. 9시 개장에 맞춰 8시 30분쯤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산 위라 날씨가 달랐다. 일기예보에는 없던 비바람이 불고, 갑자기 쌀쌀해졌다. 입구에서 본존불이 있는 곳까지는 십 분 정도 걸어가야 해서, 직원들이 개장 10분 전 문을 열어주셨다. 비에 젖은 산길과 안개 낀 풍경이 운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있어 마음이 급해져 주변 풍경을 천천히 즐길 여유는 없었다.
입장 시간에 맞춰 도착한 덕분에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석굴 내부의 유리창은 맑고 깨끗해서 본존불을 비롯한 내부 조각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천천히 눈에 꼭꼭 담고 싶었지만, 입구에 사람이 오래 머무르면 동선이 막히기 때문에 관리 직원들이 계속 이동을 유도했다. 다행이 아직 입장객이 많지 않은 시간이라 비교적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밀려드는 인파에 떠밀려 스쳐 지나가듯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유리창 너머로만 일부를 관람해야 한다는 점이 늘 아쉽다. 내부에 들어가 본존불을 돌며 본존불과 그 주변 조각들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체험이 될 텐데, 보존을 위한 제약상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한국 불교 조각의 원형이자 정점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불상 조각은 점차 쇠퇴한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지만, 불상 제작은 지방 호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조형미가 떨어진다. 비례가 어색하거나 디테일이 조잡한 조각들을 보면 나는 종종 “고려불상 같다”는 표현을 쓴다.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시기에 조성된 석굴사원으로, 깊은 산속에 자리해 있어 오랜 세월 동안 비교적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보존’을 명목으로 강제로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보수 공사는 사실 천장 앞부분만 수리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데라우치 총독은 대국민 과시용 프로젝트로 이를 완전 해체하고, 대대적으로 시멘트를 덧발라 개수하는 공사를 벌였다. 이 조잡한 복원으로 석굴암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무엇보다 내부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해방후 군사독재 시절에는 박정희의 지시로 다시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번에는 습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중 콘크리트 돔을 씌우는 방식이었다. 석굴의 전실에는 목조 지붕을 얹기 위해 기존 석굴 구조를 변경하면서 또 다른 변형이 일어났다.
원래 석굴암은 샘물 위에 세워져, 자연스럽게 찬 공기가 내부로 유입되면서 습기는 바닥에만 맺히고 전체적으로는 건조하고 환기가 잘 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일본의 개수 공사로 샘물이 제거되고, 시멘트로 마감되면서 통풍이 차단됐다. 이후 해방 후의 보수 공사에서도 밀폐 구조가 유지되면서 석굴 내부의 습기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과거의 석굴암은 유리창 너머로 뿌연 습기를 끼고 바라봐야 했다. 현재는 기계를 이용해 내부 습기를 강제로 제거하고 있지만, 원래의 자연 환기 구조가 사라졌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기계에 의존한 보존 방식은 작치가 멈추거나 고장이 날 경우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고, 미세한 기계 진동이 석굴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미륵사지 석탑처럼 시멘트를 제거하고 원형 복원을 시도한 사례도 있는 만큼, 석굴암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비록 그 과정에서 십 년 동안 관람할 수 없게 되더라도, 온전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석굴암 앞에 서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날씨가 좋으면 동해바다까지 보일텐데, 날이 많이 흐렸다. 벌써 방문객 줄이 저 멀리까지 늘어져 있다.
내려가는 길에는 복원 과정에서 남겨진 석재 부재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신라인의 손길이 깃든 유물'이라며 미화되어 있지만, 실상은 일제 강점기 때 허술한 해체 복원에서 어디에 쓰였는지 알 수 없어 방치된 재료들이다.
관람 자체는 약 20분 정도로 짧았지만, 하산길에 마주한 도로 상황은 놀라웠다. 반대편에서는 차량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도로는 이미 정체로 꽉 막혀 차량이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좁은 산길은 말 그대로 길고 긴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경주에서 가장 방문 난이도가 높은 곳은 단연 석굴암이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불국사 정문 주차장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미 붐비고 있어 조금 돌아 넓은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를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날씨는 여전히 오락가락했지만, 식당 대기 중에 잠시 뜬 커다란 무지개도 볼 수 있었다.
불국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십 대 시절, 친구와 함께 떠난 뚜벅이 경주 여행에서 비 오는 날의 불국사는 조용하고 운치 있는 곳이었다. 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불국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비가 오는 와중에도 관람객들로 북적였고, 그때의 한적함이 그리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모습에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입구에서 본 사천왕상이 용의 입에서 여의주를 빼앗는 듯한 자세가 재미있었다. 그리스로마 신화 헤라클레스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사천왕이나 금강역사가 되었다. 헤라클레스 12과업 중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보니 물뱀 휘드라와 싸우는 장면이 비교적 비슷한 것 같다.
불국사 정면을 바라보면, 왼쪽에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오른쪽에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다.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연화교와 칠보교과 조금 더 작은데,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한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 하층 석축은, 아래에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자연석 바로 위에 장대석을 얹고 자연석의 자연스러운 형태에 맞추어 깎았다. 이런 기법을 그랭이질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목조 건축에만 있는 방식이라고 한다.
불국사의 계단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다리 형태로 설계되어 그 아래에 아치형 구조물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이 공간에 '구품연지'라는 연못이 있어, 사람들이 배를 타고와 다리를 올라 불국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연못에 비친 불국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석굴암에 이어 꼭 원형 복원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불국사 정면에 있는 계단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관람객들은 옆의 비탈길을 따라 올라 회랑 옆으로 입장하게 된다. 본존불이 모셔진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이탑일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즉, 대웅전 앞에 두 기의 석탑(석가탑과 다보탑)을 세운 배치로, 통일신라 시대에 확립된 대표적인 사찰 구조 양식이다.
불국사 대웅전이 있는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구조와 형태가 독특한 이형 석탑으로, 기단부에는 원래 네 개의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해, 현재는 코가 부러진 상태의 사자상 하나만 남아 있다. 탑 내부에는 원래 사리함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일제강점기 해체 수리 과정에서 사라졌다. 정황상 도난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에게 이런 사자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당연히 아는 건데 왜 이야기하지?' 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실제로 주변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 내용을 신나게 설명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건지, 어린이 책에 실린 건지 모르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문화재에 대한 교육을 잘 받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탑 근처에서 어떤 할아버지는 자신의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직접 다보탑에 올라가 사자상에 앉아 찍은 사진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그땐 그랬지.
석가탑은 한국 석탑의 원형이자 전형이라 불리는 탑이다.
석가탑은 기단부 2층, 탑신부 3층,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끝이 처마처럼 살짝 들려 올려져 있어 지붕돌임을 확인할 수 있다. 1층의 몸돌은 2층 이상의 몸돌보다 높이가 두 배 정도인 것이 일반적이다. 탑신부가 몇층이냐에 따라 탑의 층수가 정해진다. 현재 석가탑의 상륜부는 원형이 소실되어, 남원의 실상사 탑을 참고하여 복원한 것이다. 정갈한 석가탑의 본체와 비교하면, 복원된 상륜부는 다소 화려하고 복잡한 인상을 준다.
4년 전 경주 여행 때 처음으로 석가탑을 본 아이가 당황해하며, "엄마, 난 석가탑이 5층으로 보여"라고 말했다. 나도 어린 시절 처음 석가탑을 봤을 때 5층으로 보여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기단부가 워낙 크고 두꺼워서 마치 하층 2층, 상층 3층으로 이루어진 5층 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966년, 도굴 사건으로 석가탑이 훼손되면서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석가탑 2층에서 사리함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들어 올린 2층 옥개석이 떨어져 바닥에 있던 3층 옥개석을 부서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믿기 힘든 사고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오늘날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겠지만, 당시 문화재 복원에 사용된 장비가 겨우 전봇대와 장대가 전부였다.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관음에서 내려다 본 다보탑의 모습이다.
비로전 옆에 있는 이 사리탑은 일제강점기에 불법으로 일본에 반출되어 일본의 요리집 정원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본래 위치’에 반환되었다.
그들이 이 유물을 좋은 뜻에서 되돌려준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영원히 일본의 일부가 될 것이라 믿었기에, 상징적인 문화재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으려 했을 뿐이다. 만약 36년 후 일본이 이 땅에서 쫓겨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들은 더 많은 유물을 가져갔을지언정, 결코 돌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락전에 들어서자마자 긴 줄이 보여 순간 당황했다. 그 줄은 바로 극락전 마당에 놓인 '복돼지' 동상을 만지고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었다.
2007년에 극락전 현판 뒤에 작은 돼지 조각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 1750년 경에 다시 지어졌는데, 이 복돼지 조각은 그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측에서는 이 돼지 조각에 ‘극락전 복돼지’라는 공식 이름을 붙이고, 현판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복돼지를 누구나 쉽게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극락전 앞 마당에 자그마한 복돼지상을 새로 제작했다. 덕분에 이제는 극락전 앞 마당에 있는 복돼지가 더욱 유명해진 듯하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를 다룬 다큐 영화 제목이다. 자본주의 미술 시장을 비판하는 그 제목처럼, 놀이공원이든, 미술관이든 어디를 가든 꼭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이다.
나는 기념품을 잘 사지 않는데, 아이는 기념품을 너무 좋아한다. 불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교 용품이 많고, 디자인도 평범했지만 아이 때문에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여기서도 케데헌은 인기였다. 케데헌과 직접 관련은 없는 것 같지만, 케데헌 이름을 붙인 상품이 여럿 있었다.
데페이즈망 효과를 노리는 걸까, 힙한 부처님이다. 서핑하는 모습까지는 이해하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은 정말 이질적이다.
*데페이즈망: 일상적인 사물을 맥락과 상관없는 이질적 환경에 배치해 낯선 만남과 강한 심리적 충격 효과를 노리는 초현실주의 회화 기법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로, 그의 재위 시기는 통일신라의 정치적·문화적 안정기였다.
이 시기에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불국사, 석굴암, 석가탑, 다보탑, 남산의 불상들, 월지 출토 판불, 그리고 현재는 남아 있지 않은 황룡사의 대종, 분황사의 약사여래입상 등 많은 문화재가 제작되었다. 대부분 국가 차원의 대규모 불사였으며,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규모였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의상의 제자인 표훈 대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표훈은 하늘에 기원했지만 처음에는 "딸은 되지만 아들은 안 된다"는 응답을 받았다. 왕은 딸을 아들로 바꿔 달라고 다시 청했고, 하늘에서는 "아들이 되게 할 수는 있으나, 그로 인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왕은 나라가 위태로워져도 상관없으니 아들이면 충분하다고 하였고, 결국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태생의 특별함 때문인지 성정이 여성스러웠다고 전해지며, 비단 주머니 차기나 부녀자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부터 통일신라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불국사와 성덕대왕신종 등은 혜공왕 대에 완성되었으나, 연이은 대규모 국가 사업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었고, 혹은 이미 쇠퇴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불사를 진행한 결과일 수도 있다.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도 아들이면 족하다"는 경덕왕의 바람은 충족되지 못했다.
혜공왕은 재위 중 반란에 휘말려 결국 후계자인 선덕왕과 원성왕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는 통일신라의 본격적인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660년, 태종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시켰고, 그의 아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리며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뜻에 따라 바다 위의 작은 돌섬에 수중릉이 조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문무대왕릉이다. 실제로는 시신을 매장한 것이 아니라, 불교식 화장을 하고 제사를 지낸 후 재를 뿌린 것으로 보인다.
문무대왕릉은 찾기 어렵지 않다.
작은 돌섬이지만 주변에 다른 섬이 없어 쉽게 눈에 띄며, 공영주차장이 바로 앞에 있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문무대왕릉이 잘 보이는 무인 카페도 있는데, 바닷바람이 차가운 날에는 3층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이날 문무대왕릉 앞 바다에는 파도가 거셌고, 기러기 떼가 장관을 이루었다. 함께 여행하기로 한 가족과 이곳에서 만났고, 바닷바람이 차가웠지만 아이는 친구와 신나게 바닷가에서 뛰놀았다.
감은사지는 문무대왕릉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 이후,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동해 어귀에 절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절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이를 완성하여 감은사(感恩寺)라 이름 붙였다. 부왕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뜻이었다.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감은사 금당 구들장 아래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다. 감은사 금당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바다용이 절 아래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조성한 물길이라 전해진다.
감은사는 불국사처럼 이탑일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를 따르고 있다.
현재는 금당과 강당 등 건물터와 함께, 3층 석탑 두 기가 남아 있다. 이 동서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 석가탑과 비슷한 구조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 탑은 이층 기단 위에 삼층 탑신이 올라가며, 상륜부는 침만 남아 있는 상태다.
감은사지의 석탑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표지에도 실려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인 유 교수는 이 석탑을 우리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로 소개한 바 있다.
새벽부터 움직여 피곤했지만, 여행 첫날의 설렘과 일행과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황리단길로 이동해서 저녁을 먹었다. 황리단길의 야경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현대적으로 지어진 한옥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어우러져 거리 전체가 참 예뻤다. 젊은이들과 외국인들로 활기차고, 축제 기간이라 대릉원 일대는 밤에도 조명으로 화려했다.
회색 미피가 있는 미피 스토어에 들렀다. 회색의 미피 석굴암 에디션이 너무 귀엽다.
밤에도 대릉원 조명이 환해서 산책하기 좋았다.
첨성대 조명은 계속 색깔이 달라진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도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