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계림/ 천마총/ 분황사/ 황룡사지
경주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보통 마지막 날에는 일정을 간단히 잡는 편이다.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을 들르기 위해서다.
아이가 천마총에 가자고 했다. 천마총은 여러 번 방문했고, 최근 리모델링된 전시도 이미 본 데다, 대기 줄이 너무 길어 어제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릴 때 본 기억뿐이라 다시 가고 싶어 했다.
천마총에서 가까운 대릉원 주차장은 외부 행사로 주차가 어려워 차를 돌리다가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곳에서 대릉원까지는 걸어서 이십분 정도 걸린다. 대릉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어제 궁금해했던 월성을 지나기로 했다.
월성은 마치 작은 언덕처럼 보인다. 돌과 흙으로 인공적으로 쌓은 성으로, 서울의 몽촌토성이 떠오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석 씨 왕조의 시조인 석탈해는 ‘용성국’ 출신이다. 용성국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은 일본 남부나 인도 지역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석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머물 곳을 찾던 중, 눈에 띄는 언덕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은 호공이라는 인물의 집이었다. 석탈해는 밤중에 몰래 그 집에 들어가 숯과 숯돌을 묻은 뒤, 다음 날 호공에게 "이곳은 본래 내가 살던 집이며 대장간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땅을 파 보니 숯과 숯돌이 나왔고, 그는 결국 그 집을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석탈해의 집이 된 곳이 바로 월성이다.
이후 신라 제2대 왕 남해왕은 석탈해를 사위로 맞이한다. 남해왕의 아들 유리왕이 제3대 왕으로 즉위하고, 그 뒤를 이어 석탈해가 제4대 왕이 된다. 그의 뒤를 이은 제5대 파사왕은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남해왕의 아들로, 왕위는 다시 박 씨 왕조로 이어지게 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파사왕은 지혜로운 인물로, 박혁거세가 처음 궁성으로 삼았던 금성에서 이 월성으로 왕궁을 옮겼다고 한다. 다만 금성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월성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전망이 탁 트여 있어 인상 깊었다. 저 멀리 아래에 첨성대도 보인다. 석탈해가 탐낼 만한 집터였고, 왕궁으로 삼기에도 제격이었을 것이다.
월성을 따라가는 길에 석빙고도 볼 수 있었다. 신라 시대에도 석빙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석빙고는 조선 영조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월성을 내려와 대릉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계림에 닿는다. 이곳은 신라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 장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숲 속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와 살펴보니, 나무 위에 금궤가 있었고 그 안에 한 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김알지였다.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김(金)’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계림은 실제로도 울창한 숲의 분위기로 전설이 깃든 장소답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계림을 지나 대릉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첨성대가 자리하고 있다. 첨성대는 경주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여행하는 동안 여러 번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드디어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에 도착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천마총 입구에는 긴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지만, 이날은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추석 연휴가 거의 끝난 시점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귀가한 듯했다. 여전히 방문객은 많았지만 확실히 한결 여유로웠다.
아이는 천마총에 꼭 가고 싶어 했지만, 막상 내부에 들어가고 나서는 다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전시된 유물들이 거의 모두 모형이라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어제 박물관에서 진품 많이 봤잖아”라고 해도, 아이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모양이었다.
천마총은 원래 발굴 계획에 없던 무덤이었다. 1970년대 ‘경주 관광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석굴암 진입로 건설, 불국사 복원, 국립경주박물관 건립 등이 추진되었고, 그 핵심 중 하나가 신라 최대 고분인 황남대총의 발굴과 그 유물 전시였다.
하지만 황남대총은 남북 120미터, 동서 80미터, 높이 2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으로, 당시 발굴 경험이 부족했던 조사단에게는 벅찬 대상이었다. 이에 대안으로 바로 옆의 중형 고분을 시험 발굴하게 되었고, 여기서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과 관모, 금제 허리띠, 목걸이, 유리잔, 환두대도 등 화려한 부장품들 속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였다.
신라 시대에는 금관이나 장신구처럼 금속 공예품은 많이 남아 있지만, 회화는 극히 드문 편이다. 그런 점에서 천마도는 신라 미술사에서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발견이었다. 이로 인해 이 고분은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황남대총 대신 일반에 내부를 공개하는 전시관으로 꾸며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마총 내부는 발굴 당시의 상황을 충실히 재현해 놓았고, 벽면에는 돌무지무덤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돌무지 구조는 신라 마립간 시기에 실제로 축조된 유적이라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분황사로 이동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원효대사와 자장법사도 머물렀던 곳이다. 절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 이전에 세워진 대표적인 전탑 양식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 또는 9층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중국은 벽돌로 쌓은 전탑, 일본은 목재로 만든 목탑, 한국은 주로 돌로 만든 석탑이 발달했는데,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보기 드문 전탑 형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탑이 벽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돌을 벽돌처럼 잘라 정교하게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분황사는 탑 자체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사찰이 자리한 주변 환경이다. 이 일대는 경주의 주요 관광지들에서 살짝 떨어져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옆에는 황룡사 터가 이어져 있어 넓은 부지 위에 봄이면 청보리밭과 유채꽃이,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조용한 경내에 앉아 탑을 바라보며 잠시 쉬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머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아이는 종각에서 직접 종을 쳐 보고, 친구와 함께 작은 석탑을 쌓으며 즐겁게 놀았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 황룡사지로 이동했다. 분황사 옆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이름 끝에 ‘-지’가 붙는다는 것은, 과거에는 절이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곳은 광활한 허허벌판에 주춧돌 몇 개만이 남아 있다. 오래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그 돌들을 따라가며 가람 배치를 상상하고, 건물의 규모를 짐작해 보았었다.
최근에는 황룡사지 역사문화관이 새로 들어서면서, 이제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졌다. 황룡사 터에도 난간과 보호시설이 생겨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없지만, 대신 유적은 더욱 정돈되고 잘 보존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이 월성 남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려 하자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났다. 백성들은 이를 두려워했고, 왕은 하늘의 뜻이라 여겨 궁궐 대신 절을 세웠다. 그 절이 바로 황룡사이다.
자장대사는 선덕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룡사에 구 층 목탑을 세우고, 신라에 ‘삼보(三寶)’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삼보란, 진흥왕이 조성한 황룡사 장륙존상,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전해지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 그리고 선덕여왕 때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을 말한다.
역사문화관 1층 로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통문화대학교에 의뢰해 제작된 9층 목탑 1/10 축소 모형이다. 탁 트인 통유리창 앞에 놓여 있어, 외부 황룡사지에서도 한눈에 보인다. 비록 축소 모형이지만 그 크기와 세부 구조는 실제 탑의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실제 복원 작업에도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있는 전통문화대학교 대학원생들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과거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전통을 잇는 듯한 이 복원 과정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 마치 복원조차 백제 장인에게 다시 의뢰한 듯한 느낌이다.
로비 통창 앞에는 카페와 뮤지엄숍이 있어, 황룡사지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여행의 마지막을 맞은 아이는 이곳에서 기념품 쇼핑을 신나게 즐겼다.
2층 전시실에는 황룡사와 9층 목탑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12세기 후반 고려 명종 시기의 문인 김극기가 황룡사 9층 목탑 안 계단을 타고 올라가, 꼭대기 난간에서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지은 시였다.
황룡사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 강과 일천산이 한눈에 보이네.
굽어보니 경주의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천 년 전, 고려인이 이 장엄한 목탑에 올라 바라보던 경주의 풍경은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전시의 마지막은 황룡사를 주제로 한 3D 영상이다. 진흥왕 시기의 창건부터 9층 목탑의 건립, 그리고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불타 무너지는 순간까지, 황룡사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불길에 휩싸여 목탑이 붕괴되는 마지막 장면은 강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상은 현재 진행 중인 황룡사지 복원 사업의 계획을 알리는 홍보 자료이기도 하다.
경주 시내에서도 비교적 한적하고 넓은 이곳. 언젠가 황룡사와 9층 목탑이 복원된다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고신라 불교 유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