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금관 특별전
설 연휴 첫날 새벽 5시, 서울을 출발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현재 박물관에서는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 큰 인기를 끌며 2026년 2월 22일(일)까지 연장 전시 중이다. 신라 금관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지 104년 만에 여섯 점의 금관이 한자리에 모인 최초의 전시이다. 관람료는 무료지만, 30분 간격 회차별로 150장씩 배부되는 입장권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관람일 일주일 전에 열리는 온라인 예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바람에, 매일 오전 9시 20분에 선착순으로 배부하는 현장 입장권을 노려야만 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40분, 박물관 매표소 앞은 현장 발권을 기다리는 인파로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주차장을 빙 둘러 몇 번이나 꺾인 줄은 그 끝을 찾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멀리서 왔는데 과연 표를 받을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줄을 살폈다. 지난 추석 연휴에도 경주 여행을 다녀왔기에 이번에는 오직 이 특별전 하나만을 목표로 온 길이었다. 박물관 정규 개관 시간은 10시지만, 특별전은 9시 30분부터다. 9시 20분이 되자 빠른 시간 회차부터 입장권을 배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오후 1시 입장권을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새벽 출발로 배도 고프고 피곤했기에, 월성 옆길을 따라 대릉원을 가로질러 황리단길로 갔다. 불과 몇 달 전 추석은 무더웠는데, 그새 겨울 풍경으로 바뀐 대릉원이 새롭게 보였다. 짧은 산책이었지만 대릉원과 황리단길을 다녀오니 경주에 왔음이 실감 났다. 황리단길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쉬다가 다시 천천히 걸어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추석 방문 때는 리노베이션 중이라 관람하지 못했던 월지관을 둘러보며 예약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1시, 드디어 특별전시실에 입장했다. 이번 전시는 신라가 금관을 통해 권력과 위신을 과시했던 마립간 시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신라 초기에는 박, 석, 김 세 가문이 번갈아 왕위를 이었지만, 내물 마립간 때부터 김 씨 왕조가 독점적인 권력을 쥐게 된다. 초기 왕을 지칭하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을 거쳐 내물왕부터 소지왕까지 마립간으로 불렸고, 이후 지증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이라는 호칭과 신라라는 국호가 정착되었다. 대릉원의 수많은 고분은 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 단 6명의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다. 김알지와 미추왕 신화, 그리고 대형 고분 축조는 모두 김 씨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전시의 시작은 교동 금관이었다. 도굴한 금관을 압수한 것이라 그 시기와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테두리 위에 작은 가지 세 개가 있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초기 금관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도판으로 보면서 조악해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물로 본 금관은 화려한 전시 연출과 조명 덕분인지 무척 우아하고 단아했다. 첫 금관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앞으로 보게 될 다른 금관들은 얼마나 화려할지 기대가 되었다.
교동 금관을 지나자 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금관들이 각각 함께 출토된 금허리띠와 세트를 이루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신라의 금관은 보통 금허리띠와 세트로 발굴되는데, 이 둘은 당대 왕족의 절대적인 권력과 위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이 세 고분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대릉원 최대 고분인 봉황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만약 봉황대가 마립간 무덤이라면 이들은 왕비나 왕자 등 일가족일 가능성이 있다. 하나의 쇼케이스에 나란히 전시된 세 금관이 어쩌면 한 가족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했다.
서봉총 금관은 내부에 십자형 금판 띠가 교차하고 그 중앙에 봉황이 앉아 있는 독특한 형태다. 대부분의 신라 금관은 출토 당시 테두리가 이마가 아닌 턱까지 내려와 얼굴을 덮은 채 발견되었기에, 생전에 쓰던 관이 아니라 사후를 위한 데드마스크용 부장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서봉총 금관 내부의 이 십자형 띠가 머리에 쓰기 위한 골격 역할을 하므로, 실제 착용을 위한 모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다.
‘서봉총’이라는 명칭은 발굴 당시 스웨덴 왕자가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자어 ‘서’와 봉황 장식에서 ‘봉’을 따서 지어졌다.
이 무덤의 피장자는 신라의 여성 최고위층으로 확인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발굴에 관여했던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가 술자리에서 평양 기생에게 서봉총 금관과 금허리띠 등 진품 장신구를 직접 착용하게 하고 사진으로 남겨 큰 공분을 사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우리 문화재가 겪어야 했던 수모를 보여주는 씁쓸한 이야기이다.
금관총은 1921년 최초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이로 인해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근 유물을 보존 처리하고 고분을 재발굴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 새겨진 칼들이 연이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사지왕이 당대 마립간 중 한 명인지, 혹은 피장자에게 유물을 하사한 또 다른 왕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그 실제 주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는 신라 고분에서 무덤과 관련된 인물을 추정할 수 있는 글자가 확인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늘 이 금관총 금관과 천마총 금관의 생김새가 비슷해 헷갈리곤 한다. 그럴 때는 중앙에 솟은 나뭇가지 모양 장식의 개수로 둘을 구분한다. 천마총은 네 개, 금관총은 세 개이다.
금령총은 금방울 장난감이 함께 출토되어 금령총이라 불린다. 다른 금관과 달리 화려한 초록색 곡옥 장식이 없고 크기도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듯 다른 금관들보다 낮은 위치에 작은 금허리띠와 함께 전시한 연출이 인상 깊었다. 무덤 주인의 나이가 10세 미만으로 추정되어 딱 우리 아들 나이 또래이다. 아이도 특히 애정을 가지고 관람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천마총은 원래 발굴 계획에 없던 고분이었다. 1970년대 경주 관광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신라 최대 고분인 황남대총을 발굴해 그 내부를 대중에게 공개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의 발굴 기술과 경험으로는 그토록 거대한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경험을 쌓기 위해 바로 옆에 자리한 중형 고분을 시험 삼아 파보았는데, 그 곳에서 금관을 비롯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금관과 금제 관모, 허리띠, 목걸이, 유리잔, 환두대도 등 화려한 부장품들 사이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였다. 신라의 유물은 금관이나 장신구 같은 금속 공예품이 주를 이룰 뿐, 회화 작품은 극히 드물다. 그런 점에서 천마도의 출토는 신라 미술사에서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발견이었다. 백마의 그림 덕분에 이 고분은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원래 계획했던 황남대총 대신 내부를 공개하는 전시관으로 꾸며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립간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고분의 규모가 작아지는 경향을 고려할 때, 마지막 마립간인 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금관의 모델로 유명하다.
전시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황남대총 금관이다. 신라 금관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양쪽에 각각 세 개씩 화려한 드리개가 길게 늘어져 있다. 이번 특별전의 메인 포스터 주인공이기도 하다.
전시장 한 가운데 독립된 쇼케이스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 뒤에 서면 마치 금관을 쓴 것 같은 연출이 가능하다.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들의 긴 줄이 이어졌고, 우리 가족도 얼마간 기다린 끝에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으로 나란히 이어진 거대한 쌍분으로, 각각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여성 무덤인 북분에서 이토록 화려한 금관이 출토된 반면, 남편인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분에서는 오히려 격이 한 단계 낮은 금동관이 나온 것이다. 왕의 무덤이라면 당연히 금관을 기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조성되어 아직 전형적인 금관이 정립되기 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부터, 남분에 묻힌 왕이 왕비보다 신분이 낮았을 가능성까지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신라 시대 지배층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으며, 왕위 계승 서열도 아들 다음으로 사위가 거론된다. 부인의 신분이 더 높을 경우 결혼 후에도 부인을 존대하는 풍습이 있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 대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라의 장례 문화는 획기적으로 변한다. 거대한 고분 대신 시신을 화장하여 교외에 석관묘를 쓰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황금은 불교 사원과 불상을 장식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금관도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황금 장신구의 몰락이 아니라 신라 통치자들의 권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방식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 금관은 사진이나 모형으로 많이 보아왔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금관은 특별했다. 천오백 년의 세월을 지나왔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전시는 며칠 뒤면 끝이 난다. 서봉총 금관은 국립청주박물관으로, 황남대총과 금령총 금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가게 된다.박물관 앞은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하며 국립경주박물관 영구 전시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실적인 제약들로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십 년에 한 번씩 이처럼 금관특별전을 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십 년 뒤, 성인이 되어 있을 아들과 함께 우리 가족은 다시 경주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때쯤이면 새로운 금관이 발굴되거나 혹은 금관에 대한 또 다른 역사적 발견들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