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 되면 생각나는 책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미국인이 미국인을 위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이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1986년에 쓴 ‘한국전쟁의 기원’에 최근 자료를 반영하여 2017년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1951)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은 피카소가 한국을 소재로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한국전쟁의 기원’ 책 표지이기도 했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패한 전쟁이다. 그래서 잊힌 전쟁,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전쟁, 버려진 전쟁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인의 자긍심을 해칠 만큼 충격적인 실상을 밝히려 한다. 오늘날 민주화되고 역사 인식의 수준이 높은 남한에서 그 진실은 평범한 지식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며 반공교육을 받은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은 평범한 지식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한국전쟁에 관해 전혀 몰랐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었던 지식이었다.
한국 전쟁의 기원
분단 이후 남과 북은 38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계속해서 벌여왔다. 특히 1949년 남한은 북한을 여러 번 도발했는데 당시 북은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수만 명의 병사가 여전히 중국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초 중국에서 싸움이 끝나면서 그들은 북한으로 돌아왔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최강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50년에 남과 북은 어느 쪽이 먼저 움직일지 지켜보며 서로의 도발을 유발하려고 했다.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공격을 유도하려고 했으며, 이를 두고 북은 지금껏 남한의 북침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해 한국전쟁을 6·25로 기억하게 되었다.
맥아더는 영웅인가?
한반도 끝까지 밀리던 전세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된다. 연합군과 남한군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고 11월 23일 미군들은 느긋하게 추수감사절을 즐겼다.
마오쩌둥은 많은 조선인이 중국혁명과 항일투쟁, 중국내전에서 희생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이미 북한이 흔들리면 중국은 그들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외무부는 "지난 몇 십 년간 우리 편에 섰던 조선인들"에 대한 중국의 의무를 거론했다. (p 59)
북한과 중국은 미국을 북한 안으로 깊이 유인하는 전략을 썼다. 미군의 보급로를 길게 늘인 다음 겨울을 기다려, 전장에서 극적인 반격을 가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이다. (p 60)
북한군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압록강까지 쫓겨 올라간 것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한 것이다. 영하 22도의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씨와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은 다시 후퇴하게 된다. 중공군의 개입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전쟁초기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며, 맥아더의 주장대로 ‘인해전술’도 아니었다. 연합군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단지 나팔과 호각을 이용하여 연합군 병사들로 하여금 포위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맥아더의 계획은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또한 저자는 미국이 패배한 이유가 적을 너무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맥아더를 포함한 미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너무도 몰랐다. 그들은 한국인을 단지 황인종 미개인 정도로만 생각했다.
1950년대 뮤지컬 '그리스'에서 바람둥이 마티가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 이야기를 할 때(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었다) 친구들은 “한국에 있다고? 너 이제 원주민까지 사귀는구나.”라며 놀리는 대목이 있다. 이 뮤지컬 대사가 당시 한국인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말해주는 것 같다.
중국군이 대거 투입되자마자, 맥아더는 공습으로 북한 영토 수천제곱마일에 걸쳐 있는 모든 "시설, 공장, 도시, 마을"을 파괴하여 전선과 압록강 국경 사이를 불모지로 만들라고 명령했다.(p 64)
마을과 들판 곳곳에서 주민들은 불시에 습격을 받아 네이팜탄이 터질 때 취했던 자세 그대로 죽어 있었다. 한 남자는 자전거에 올라탈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놀고 있었으며...(p 65)
이때 미국은 네이팜탄을 사용해서 북한을 '달의 표면'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핵폭탄도 거론했다.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탄 많은 피란민들은 중국군이 무서워서 그 배를 탄 것이 아니었다. 미군이 흥남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스마트하지 않았고,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미국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남한을 북한의 침입에서 구해주었다고 배웠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32년이다.
한국전쟁의 시작은 일본군이 만주국을 세웠던 1931~32년에 있다.
일본은 1905년에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았고, 1910년에 모든 강국들, 특히 미국의 축복을 받으며 식민지로 삼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 지도자들의 기술과 사내다움에 찬사를 보냈고, 일본이 조선을 근대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은 세계사적 시간대에서 뒤늦게 출현한 이상한 식민지였다. 세계적으로 식민지 분할이 완료된 후였고 식민지 체제 전체의 해체를 요구하는 진보적인 목소리가 등장한 이후였다. 특히 대다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훨씬 일찍 독립국가의 요건을 대부분 갖추었다(공통의 언어, 민족성, 문화, 10세기 이래 확고하게 인정된 영토 등). 따라서 일부 다른 식민지 원주민과 달리, 한국인은 대부분 제국의 지배를 오로지 불법적이고 굴욕적인 것으로만 여겼다. 특히 두 민족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발전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에 격렬하게 충동했다. (p 19~20)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많은 엘리트들이 있었고 그들이 순조롭게 조선의 독립을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 세계적인 침체와 일본의 억압으로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변절했다.
많은 애국자들은 무장투쟁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만주로 떠났다. 이 중 상당수는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공산당에 들어가 그들의 공산혁명을 도왔다. 그들이 조선의 독립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일성을 비롯한 이 유격대원들은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했다.
반면, 조선의 야심 많은 엘리트들은 가장 암울했던 이 시기에 출셋길의 기회를 잡는다. 총독부 경찰이 되거나 일본군 장교로 입대한다. 박정희도 만주국 군인이 되었다. 이광수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자 지식인 몇몇은 공개적으로 일본제국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 후 남한의 지도자들이 된다.
끝나지 않은 전쟁...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처음으로 중대한 대유격전을 시작하여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도왔다고 추정되는 이는 누구든지 죽였다. 이때 사악한 학살이 벌어졌으며 이 경험은 북한의 가장 유명한 가극 ‘피바다’의 배경이라고 한다.
반공교육을 받던 어린 시절, 북한의 잔혹함의 예시로 그들은 가극의 제목조차 ‘피바다’라며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다. 피바다는 북한의 호전성을 드러낸 작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의 잔혹한 학살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베는 1급 전범이자 전후에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0년대 만주국 총무청 차장을 지냈다.
아소 다로는 일본제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는 탄광을 소유한 부자의 상속자인데, 그의 가족회사는 전쟁 중에 수많은 한국인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잔인함과 끔찍한 노동조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소 다로는 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이므로, 그의 가계는 메이지유신의 지도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아소 다로는 혼인 관계를 통해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역시 총리를 지냈다), 아베 신조는 물론 황실과도 인척이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습 공산주의의 면모를 지녔다면, 전후 일본은 세습 민주주의이다. 의원들은 70~80%가 아버지로부터 의석을 물려받았거나 유명한 정치 가문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아베나 아소 같은 사람이 권좌에 오르면, 북한 지도부는 다른 이들은 모르거나 잊어버린 그들의 가계를 기억한다. (p 76)
김일성은 1932년 봄부터 만주에서 일본과 싸웠고, 그의 후계자들은 모든 것의 기원을 이 먼 시작까지 추적한다. 이 나라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 항일 국가였다. 이 국가의 담론은 항일투쟁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2009년 북한의 서열 10위까지 최고위 지도자들의 평균 연령은 일흔다섯 살이었다. 2000년 서열 40위까지의 고위 지도자들 중에 예순 살이 안 된 이는 단 한 명, 김정일뿐이었다. 이 노인 정치 체제는 1932년 이래로 죽 이어져,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이 정통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p 84)
오랜 노인 정치 국가인 북한에서 나이 어린 지도자 김정은의 행보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다.
해방 후 남한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 이전 남한 엘리트 가운데 90% 이상이 친일파라고 한다.
오랫동안 남한에서는 김일성이 사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며, 애국자의 이름을 사칭한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이야기가 정설로 되었었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남한의 지도자들이 일본을 섬겼다는 슬픈 진실에 있었다. 일본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운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면, 당신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김일성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북한의 김일성은 그 김일성이 아니라고 배웠었다.
한편 북한은 김일성의 업적을 심하게 부풀리고 신화로 만들었다. 진실은 과거 남한 정부들의 필사적인 거짓말과 북한의 끝없는 과장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p 84~85).
즉, 한국전쟁은 1930년대 만주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본과 북한에서는 각각 태평양전쟁의 침략자와 희생자의 손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여태껏 화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한은 오랫동안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그들의 빈약한 정통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빨갱이'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50년 후반 6개월 동안 방위비가 거의 네 배로 증가하면서 미국의 광범위한 해외 기지를 추구하고 국내에서 안보국가를 수립한 것도, 그리고 미국을 세계의 경찰국가로 만든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바로 한국전쟁이었다고 한다.
왜 몇십 년이 지나는 동안 북한 최고 지도부에 그토록 변화가 없었는지,
왜 일본은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지,
왜 남한의 보수정당은 여전히 색깔론에 집착하는지,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프레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 있는 문구는
“반정부인사이자 정당정치인, 정치가, 조정자, 평화중재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1924~2009)께 바친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2017년에 남한은 정권이 바뀌었고 흥남부두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탔던 부부의 자녀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 책이 오랜 시간 절판이었다 2017년에서야 재출간 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이제는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한국전쟁은 끝낼 때가 되었다고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전쟁이 왜 일어난 전쟁인지, 오늘날 북한, 일본, 미국 주변 국가들의 정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도올의 말대로 우린 너무 몰랐다. 너무도 모르고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