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강원도로 이사 왔던 2023년 12월 31일,
폭설 때문에 비행기가 연이어 연착되고 결항되던 날.
외투를 뚫고 들어오는 얼음바람과 깡추위에 어렵사리 엄마 집에 도착해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도 못 듣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날로부터 벌써 1년 하고도 10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굽이굽이 산골짜기 고향으로 내려와 이제 두 해째 겨울을 맞이한다.
엄마는 이제 막 가을걷이를 끝내고 입동 준비를 하고 있다.
볕에 잘 말린 들깨를 타닥타닥 털어서 들기름을 짜두고, 말린 햇고추로 고춧가루도 빻아 놓았다.
이번 해는 유달리 팥농사가 잘돼서 두말이 나왔다며 한 말은 만물상에 팔고, 한 말은 감자떡도 해 먹고 밥에도 넣어먹자고 하신다.
역시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강원도는 엊그제 첫서리가 왔다.
기름보일러에는 기름을 가득 채우고, 서둘러 연탄도 피우기로 했다. 강아지와 고양이 집에도 따뜻하게 두꺼운 담요와 방석을 깔아 주었다.
1년 10개월 동안 눈에 띌만한 좋은 점들이 생겼다!
엄마 집으로 와서 좋은 점 첫 번째, 내 요리 실력이 늘었다.
첫 일 년은 제주에서처럼 끼니마다 솜씨 좋은 언니 밥을 먹었다. 그런데 언니 다리가 골절되면서 치료를 받다 보니 집 안의 일들이 나에게 위임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고작 밥하기, 라면 끓이기 정도가 다였다. 칼질은 물론 주방에 있는 것도 어색했던 나였는데...
언니가 없는 동안 요리 실력이 제법 늘었다. 처음엔 난이도 최하 계란국, 어묵국으로 연명하다가 미역국, 두부찌개까지 끓이게 되었다.
하루는 돼지고기와 두부를 듬뿍 넣고 김치찌개를 처음 끓여 봤는데 머쓱하지만 내가 만들어 놓고 감탄하면서 맛있게 먹었었다.
엄마도 나에게 용기를 주셨다.
‘언니가 없어서 네가 못 할 줄 알았더니 곧 잘한다.’면서 ‘싱겁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맛있게 끓였다.’고 칭찬해 주셨다. 미식가 삼촌도 맛있다고 해주니 제법 으쓱했다.(국 말고 반찬도 도전해 봐야지!)
좋은 점 두 번째, 고양이가 생겼다.
엄마가 고양이를 입양해서 사십 년 인생 처음으로 고양이를 가까이하고, 만져보았다. 데면데면하다가 어느새 고양이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침저녁 귀여운 털복숭이들을 보면 기분 좋고 행복하다. 이제 성묘가 된 고양이는 사냥도 어찌나 잘하는지... 매일 아침 문 앞에 놓인 상납품은 사실 으악! 하지만, 치즈까미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다.
넷째 언니가 한 말이 떠오른다.
“다음 생에는 막내의 고양이로 태어나도 좋겠어.”
좋은 점 세 번째, 매일 엄마의 기도문을 듣는다.
하루도, 어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출근하기 전 엄마가 하는 말이 있다.
“급하게 가지 말고 조심히 가!”, “저 아랫길 위험하니까 그저 천천히 가!”
처음엔 잔소리로 들려서 알겠다고 대충 대답했는데 어느 순간 기도가 별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딸의 안위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엄마의 그 말이 염원을 담은 기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기도를 듣고 출근하는 삶, 품 안의 자식 대하듯 하는 엄마가 참 좋고 따뜻하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때로는 어지간히 삐끗될 때도 있지만.
계절의 오고 감에 순응하고 자연과 사람과 동물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넉넉하면 이웃과 나누면서 사는 하루하루가 그리고 이 시골의 단조로움이 나와 우리 가족을 더 깊게 만들어 준다.
길고 긴 겨울추위가 걱정이지만 무더운 여름을 잘 견딘 것처럼 다가올 계절도 안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