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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막내딸 등 터지는 날들

by 두움큼

어느새 하늘이 높아졌다. 파삭파삭하게 나뭇잎을 말리는 가을 햇살에 살며시 기분이 좋았다.

주말 오후,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엄마와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달달한 음료와 쿠기를 먹으며 느적느적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보면서 앉아 있으니 엄마는 옛 생각이 나셨나 보다.


먹을 게 귀해서 옥수수죽을 주식으로 했던 시절.

엄마가 큰언니를 임신하고 막달이 되었을 때도 거의 매일 밤 다음 날 아침을 먹을 수 있게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야 했는데...

글쎄 맷돌을 돌릴 때마다 그 억센 돌이 엄마 배를 쓸고 가서 자세를 아무리 고쳐봐도 부를 때로 부른 만삭의 배가 아프다 못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할머니의 막내아들이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삼촌이 두 살 즈음.

할머니가 삼촌 젖을 물리고 잠든 모습이 너무 야속했다던 딱한 그 시절의 우리 엄마.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이걸 아직까지 하고 있어? 나와! 내가 할게.'하고 도와주자

할머니가 버럭 화를 내며 '버릇도 참 드럽게 들인다.'며 맷돌을 마당에 던져 버렸다고 할머니의 만행을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 젖을 먹던 그때 그 삼촌은 어느 날 조현병 환자가 되었고, 아직 그 시절 한을 다 풀지 못한 엄마.

그리고 제주에서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온 막내딸은 이 둘 사이에서 결코 쉽지만은 않은 동거를 하고 있다.


사실 엄마는 장애가 없던 시절의 삼촌 모습을 알기 때문에 안쓰러워하고 잘 챙겨주시지만, 삼촌의 조현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가끔 할머니를 향한 미움이 삼촌에게 애증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삼촌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낙서 같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는 그림과 글씨를 쓰는데, 엄마는 공책을 헤프게 쓴다며 야단한다. 또 삼촌 조증이 심할 때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흐허허 웃는다. 신경이 거슬린 엄마는 혼을 내면 덜할까 싶어 시끄럽다고 그만 웃어대라고 소리친다.


나는 삼촌이 할 일이 쓰는 것 밖에 없는데 천 원짜리 공책을 좀 막 쓰면 어떠냐고, 삼촌한테 웃지 말란다고 안 웃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삼촌 편을 든다.

그러면 엄마는 삼촌 역성을 드는 게 못마땅한지 삼촌에게 안 해도 될 잔소리를 더 하는 것 같다.


고래 싸움에 막내딸은 자주 등이 터지지만 가만 보면 또 두 분은 둘도 없는 사이다.

"삼촌은 아까 커피 마셨지?"

엄마가 물으면 삼촌은 그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묻는다.

"형수도 커피 타줘요?"


그리고 엄마가 무거운 걸 들 때나 힘든 일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단 한번 싫은 내색 없이 묵묵하게 도움을 준다. 내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 엄마는 바늘에 실을 꿔달라고 삼촌을 부른다.


삼촌도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이는데도 바늘구멍에 실을 넣으려 애를 쓰고, 그런 삼촌을 기다리는 엄마.

내가 출근할 때 마당까지 나와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엄마와 삼촌.


나는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정다운 대화를 들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또 어느 날은 등이 터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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