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엄마니까 엄마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나는 엄마를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적해 온 일상들로 대략 엄마를 가늠했을 뿐, 엄마를 한 인간으로서 알아보려고는 했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더욱이 나는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엄마 곁을 떠났었다.
그리고 지금 마흔 살이 되기까지 우리는 많은 세월을 떨어져 살았다. 자그마치 이십삼 년을.
엄마와 살았던 시간은 불과 중학교 졸업할 때였으니 어릴 때 보았던,
성인이 되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본가에 와서 보낸 며칠 밤의 모습으로만 엄마를 알고 있다.
엄마로서의 엄마 말고,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를 느낄 물리적인 시간이 우리에겐 부족했다.
엄마는 꽃을 좋아하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살결이 부드럽고, 송어회를 좋아하고,
달달한 걸 좋아하고, 뻐꾸기 우는 소리를 기다리고, 이미자 노래를 좋아하는 이런 것들 말고.
엄마는 어떨 때 마음이 힘든지, 힘들면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이겨내는지.
어느 때 화가 나는지, 어떤 말에 무너지는지.
어떤 그리움이 있는지, 그런 순간들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는지.
견딜 수 없이 아픈 시간들을 무엇으로 풀면서 살았는지.
눈도 못 뜬 갓 태어난 강아지도 본능적으로 제 어미를 알듯이
눈빛으로, 온기로, 쓰다듬으로, 숨결로, 감각으로 엄마를 알고 엄마에게 사랑을 느낀다.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애착으로, 엄마 핏줄을 이은 딸로 그 무엇보다 가까운 사이지만
엄마와 딸이라는 이름을 떼고 지금이라도 인간적으로 엄마 그대로를 이해하고 알고 싶다.
새햐얀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긴 허리 굽은 엄마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같이 살고 있어도 야근도 출장도 많다는 핑계로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일상적인 대화로 서로 챙겨주기만 할 뿐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먼저 엄마에게 나를 풀어놓아보려 한다.
엄마도 막내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눠주시겠지?
우리가 함께인 지금.
나도 엄마를 알고, 엄마도 나를 아는 시간으로 만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