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결핍
풍족한 사회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랑 비교하면 그렇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1995년만 하더라도 부서에는 컴퓨터는 한대밖에 없었다. 그것도 컴퓨터가 들어오면 그 부서에는 엄청난 뉴스거리이기도 했다. 한 부서에 대략 5-6명 정도가 있었으나, 업무에 컴퓨터는 그리 필요치 않았다. 상고를 나온 여직원이 주로 문서 타이핑을 위해서 사용할 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인터넷이란 것이 보급되기도 전에 일이었으니, 이메일을 보낸다던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할 일도 별로 없었다.
집에 TV는 브라운관 TV 한대였는데, 크기는 20인치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TV가 한대라고 해서 특별히 불편한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방송을 볼 수 있는 채널이 고작 MBC, KBS, SBS 세 개뿐이었고 당시에는 종편이나 케이블 방송도 없었다. 주로 가족들이 모여서 TV를 보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채널을 보고 싶을 땐 리모컨 다툼이 종종 있기도 했지만, 채널 3개 중에 하나로 타협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인기 있는 프로는 거의 MBC였기 때문에.
이젠, 멀티 디바이스가 기본이 된 세상이다. 개인용 노트북 한대와 스마트폰 한대는 필수가 되었고, TV는 한 집이 아니라 방 하나씩을 점령할 기세이다. TV 채널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OTT와 유튜브까지 더해지니, 이제는 여러 명이 한 개의 채널을 갖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여러 개의 채널을 갖고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다.
볼 수 있는 것들도 보아야 할 것도 넘쳐난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는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 더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물질적 풍요로는 행복해 지기 어려운 이유이다. 왜일까? 행복은 절대적 결핍보다는 상대적 결핍이 충족되었을 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예전보다 더 커졌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랜저를 타면 성공한 시대에서 이제는 벤츠 e클래스 정도는 타고 다녀야 성공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누군가는 우리가 없는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이 사회는 소유에 대한 갈망을 결핍으로 연결시켜 상업화로 발전시키려 한다.
채우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덜어내면 그 공간은 다시금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곳을 물질적인 것이 아닌, 사유와 철학, 그리고 배려와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면 이 행복에 대한 이 고민은 그래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