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내가 왜 이렇게 힘든지에 대해 고민했다. 대체적으로 내가 괴로워하던 생각은 '내 모든 걸 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였다. 그리움보다 미련보다 무너진 신뢰로부터 오는 배신감이 컸다. 분명 여태껏 연애와 비슷하게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무엇이 달랐기에 이토록 힘들어하는 걸까. 그리고 떠올랐다. 누군가 내게 해줬던 명심하라던 그 말을
스물둘 , 종강 후 여름방학 때 졸업 요건 충족을 위해 회사로 실습을 나갔다. 내가 실습을 간 회사는 꽤나 일이 많고 바쁜 회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전공에 맞춰 설계팀으로 배정받았지만 한 달 남짓 있다 떠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게 설계팀의 누구 하나 나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지금 직장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귀찮은 존재인 내게 투명인간 대우는 어쩌면 당연했다. 당시에도 나를 제외한 설계팀 사람들은 매일 새벽까지 작업을 했고, 아침에 내가 출근을 하면 그들이 철야를 하며 먹었던 피자박스가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나를 유일하게 챙겨주신 분이 계셨는데, 설계팀이 아닌 다른 부서의 부장님이셨다. 40대 초반의 자유로운 영혼 같던 부장님은 한 달 내내 나를 데리고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사무실에서 일 없이 앉아있을 때는 나에게 회식 공지용 포스터를 만들어달라 일을 주셨고, 매주 월요일 아침에 사회 초년생 직원분들에게 공원에서 커피를 사주며 나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주시고 공부를 시켜주셨다. (물론 그분들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가끔은 주말에 영화를 보시곤 귀여운 피규어를 사 와 며칠 뒤면 떠나버릴 실습생의 허전한 책상 위를 꾸며주셨고, 공부가 될 만한 현장에는 나를 꼭 데려가신 후 저녁과 술을 사주셨다. 다른 회사로 이직한 분과의 자리를 마련해 업계의 다양한 기로를 보여주시고 생각지 못한 서울의 낭만과 꿈을 보여주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설계팀 실습생이지만 부장님의 직속 부하가 되어 한 달 내내 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 편이 무책임한 대표가 데려온 무지한 실습생에게도 설계팀에게도 편했을 것이다. 덕분에 한 달 동안 실습을 하며 정말 많은 경험을 하였고, 회사분들과도 조금은 가까워지고 많은 얘기들을 들으며 배울 수 있었다.
나에겐 귀한 성장의 시간들이었지만, 이쯤 되니 의문이 들었다. 날짜로 환산하면 20일 정도 겨우 볼 학생들에게 부장님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시다는 걸 그 사회 경험이 없던 그 나이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부장님은 왜 저희를 챙겨주세요? "라고 문득 내가 물었을 때, 부장님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누는 것을 좋아해. 그렇지만 스스로의 여유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있을 때 남도 챙겨줄 수 있는 거야. 나눈다는 것은 좋은 거지만 내가 이렇게 나눠준다고 너도 꼭 사람들에게 무리해서 나눠 줄 필요는 없어.
나는 내 것은 확실하게 지키고 있고, 그보다 여유가 남아 너희를 챙겨줄 수 있기에 너희들에게 베풀 수 있는 거야. 나누는 것은 좋지만 네가 줄 수 있는 것만 나누렴 기억해"
’아… 찾았다, 이 끝도 없는 배신감의 원인‘
그가 내게 바라지 않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내가 그에게 주었던 수많은 것들. 스스로 온전하지 못했기에 내 모든 걸 주고, 그만큼 그의 모든 걸 받고 싶어 했던 내 어리석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무너져버린 스스로가 애처롭고도 부끄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