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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29. 2023

우울할 땐 바디로션을 사자

누군가 가장 쉽게 기분전환을 하는 방법을 묻는다면 나는 "좋아하는 향의 바디로션을 구매하세요"라고 말하겠다.




나에게 바디로션은


어릴 때 내 기억 속 바디로션은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이 끝난 후 엄마가 치덕치덕 발라주던 바디로션이었다. 특유의 인위적인 향과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몸에 미끄덩한 로션이 발리던 그 촉감을 나는 당시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샤워를 할 줄 알게 된 순간부터 내 삶에 바디로션이란 없었다. 인공적인 향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몸 자체가 그리 건조하지도 않았기에 큰 의미가 없던 물건이었다.  


그러던 내게 바디로션이 큰 의미로 변했다. 감기처럼 쉽게 드나드는 우울과 무기력함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매일같이 의식적으로 샤워를 한다. 외출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도 우울감에 무너져 스스로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샤워를 한다. 우울감이 밀려올 때 샤워를 하면 물의 촉감과 향기, 개운함과 짧은 행위를 해냈다는 변화로 인해 기분이 쉽게 전환된다. 그리고 그 짧은 기분 전환을 소소한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 같은 물건이 바로 바디로션이다.


몇 년 전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대부분의 생일선물이 오던 때에 유명 브랜드의 바디로션을 선물 받았다. 선물 받은 나는 바디로션을 별로 선호하지 않음에도 좋은 향에 이끌려 샤워 후 몸에 조금씩 발라보았는데, 그 행위가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나를 돌보는 기분이 들어 뭉클해졌다. 바디로션을 몸에 바르며 흡수시키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고 만져주고 쓰다듬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고된 하루였어도, 우울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하루였어도 오늘도 고생했다고 스스로를 다듬는 그 시간의 의미는 갈수록 커졌다.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시간이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길을 잃을 수 있으니까. 그 돌봄을 가장 짧고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행위가 나는 샤워와 좋아하는 향의 바디로션이라고 생각한다. 




우울은 정말 수용성일까?


자발적으로 실업자가 되었고 그 선택의 연장선으로 3년 만난 애인에게 구질구질하게 버려졌다. 나에게서 한순간에 사랑도, 사람도, 커리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헤어졌어"라는 카톡 한 줄에 퇴근 후 나의 곁으로 후다닥 달려와 준 친구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카페에서 엉엉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영하러 가자,  힘듦과 우울은 수용성이야"


그렇게 친구들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수영을 할 때, 정말 놀랍게도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부드러운 물이 나를 감쌀 때, 물 안에서 자유롭게 내 몸이 헤엄칠 때 그동안 나를 억누르던 많은 생각들이 마치 솜사탕이 된 냥 부드럽게 녹아내렸고 나는 가벼워졌다.


햇빛을 받으며 물에 몸을 담그고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그대로 몸으로 느끼며 멍하니 서있는 나를 친구가 보며 다 안다는 듯 싱긋 웃었다. 


"거봐 내가 말했지?"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선물로 받았던 겨우 100ml에 몇 만 원을 받는 고가의 바디로션을 꺼냈다.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비싼 로션을 발랐다. '내가 나를 그동안 아껴주지 않았구나' 항상 나에게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가 떠난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그가 떠났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제는 홀로 남은 내가 나를 돌보아야 할 때이다. 내가 좋아하는 포근한 향과 스스로를 보듬을 때마다 부드러워지는 살결을 느끼며 조금 더 스스로를 아껴주자는 다짐을 하고 나온다. 그러고 나면 그 향과 보드라움에 우울이 조금은 멀어져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우울은 수용성에 가까우며, 내가 좋아하는 향의 바디로션은 수용성으로 녹은 우울이 다시 나에게 침투하지 못하게 잠시 막아주는 방어막과 같다.




소소한 전환, 건강한 변화


씻는 행위가 나에게 큰 의미가 되고 난 이후 좀 더 건강히 살고 싶어 졌다. 기왕이면 아무런 일이 없어도 씻은 나를 위해 바깥의 햇빛을 보고 싶어 졌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이 가장 많은 잠들기 전 개운하게 씻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운동도 시작했다.


흔한 말이지만 이별 후 운동은 슬픔을 제법 건강하게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사실 그를 잊기 위해선 몸을 고생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 시작했던 운동이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어 체육관에 매일 방문해 하루에 2~3시간씩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하루동안 전투적으로 외부에서 고생한 나의 몸에 연고를 바르듯 바디로션을  바른다. 


거기에 조금 더 나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굴러다니는 옷이 아닌 그럴싸한 잠옷을 꺼내 입는다. 조금은 내가 괜찮은 하루를 보낸 기분, 조금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 나는 이 행위를 매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 기분이 언젠가 익숙해질 때쯤 나는 새로운 향의 바디로션을 구매할 것이고 또다시 그 향에 새롭게 나를 보듬어줄 것이다. 내일 하루가 시작되면 나는 이 소소한 행복의 순간을 기다리겠지. 삶의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건 이런 사소한 행복이라는 걸 다시금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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