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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Oct 07. 2023

식물을 키우면 알게 되는 것들

무언가를 챙기는 마음의 공간

이파리가 커진 것 같다. 손가락 힘이 세서 떨어질까 최대한 힘을 빼고 이파리의 보드라운 털들을 만져본다. 화분에 쓰여있는 'made in italy' 글자가 분명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분을 돌려준다. 왠지 이파리 끝 부분이 쭈글 해진 건 내 탓인가. 물은 빠짐없이 주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먹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집에는 창가를 지키고 있는 두 식물이 있다. 셀레움과 고려담쟁이다. 이름도 지어줬다. '레미'와 '다미'.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셀레움을 식물 가게에서는 '셀렘'으로 부른다길래 '셀렘이..'라고 되뇌다 레미가 되었다. 고려담쟁이를 요즘 사람들처럼 줄여말하니 고담이가 되었는데, 왠지 섬뜩한 고담시티가 떠올라서 '고'는 떼고 다미만 남겼다. 그렇게 나는 레미, 다미와 동거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식물을 키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안 했다. 내 몸 하나 건강히 챙기는 것도 버거워서인지 나 이외에 또 다른 생명체를 데려온다는 것이 욕심처럼 느껴져서인지는 모르겠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나의 취향을 조금 더 담았다. 우드톤 가구들을 몇 개 넣고, 일과 휴식의 정돈된 공간 분리를 마쳤다. 그럼에도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 이건 어디에서 오는 공허함인가. 가구나 물건을 더 놓고 싶지는 않았다. 꽉 채워진 것보다는 비워진 것을 좋아한다. 그런 기준에서 이미 우리 집은 가득 찬 상태였다. 한동안 그 원인을 찾지 못해 아침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불쾌감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생명. 생명이었다. 우리 집에는 나 이외에 숨 쉬는 것이 없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집에서 식물을 키웠다. 아주 많이 키웠다. 좁은 주택에서도, 빌라에서도, 낡은 아파트에서도 꼭 식물만을 위한 루틴을 지켰다. 먼발치에서도 아파트의 수많은 창문들 중에 우리 집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식물에 큰 사랑이 없는 나머지 식구들의 '이제 화분 좀 그만 늘려라'는 핀잔에도 20년간 굴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부엌에서 물을 받아서 베란다까지 가는 길에 물이 뚝뚝 흘렀다. 화분의 흙을 한 번씩 갈아줄 때에는 바닥에 배양토 가루가 밟혔다. 그때는 식물이 아닌 아빠만 보였나 보다. 이제는 아빠의 식물 사랑이 그저 사랑스럽다. 그렇게 투정하던 내가 식물을 바라보며 내가 먹는 것보다 더 정성스레 물을 먹인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아빠는 아무리 힘들어도 식물을 돌보는 마음이 있는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집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은 곧 위로다. 레미와 다미가 우리 집에 온 후, 함께 살아있다는 감각이 채워졌다. 이 친구들을 귀여워하게 된 계기가 하나 있다. 집에 데려오는 날 직원분은 말씀하셨다. "식물들이 원래는 밖에서 살잖아요. 그래서 환기도 자주 시켜주시면 좋아요. 너무 비가 많이 오거나 추운 날에 환기시키기 어려우시면 선풍기 바람을 틀어줘도 괜찮습니다. 진짜 바람으로 착각해서 야외인 줄 알거든요." 선풍기를 진짜 바람인 줄 안다는 게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되는 말이었다. 이 작은 두 가지 식물 덕분에 나는 매일 창문을 열고,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며 대화를 건다. 식물을 핑계 삼아 나도 숨을 쉰다. 물을 줄 때에는 조심스럽게 화분을 싱크대로 옮긴다. 받침대를 한쪽에 내려놓고 흙이 망가질까 물을 조심스럽게 틀면서 손가락으로 모든 표면에 물이 닿을 수 있도록 퍼트려준다. 흙이 촉촉해지는 게 느껴진다. 화분 아래쪽으로 스며든 흙빛물이 천천히 빠져나온다. 그걸 바라보며 '많이 먹어야 돼~', '아이 예쁘다'같은 문장을 무심코 전한다. 이때만큼은 마치 아이를 다루는 기분이다. 그러다 가끔 이 말들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식물을 오랫동안 잘 키우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한가 보다. 식물에 대한 예찬을 주변에 종종 하다가,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식물이 사람 키우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잘 돌봐줘야 하는데 또 너무 관심을 주면 안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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