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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Jun 07. 2021

제주 | 공기를 바꾸려 티켓을 끊었다

멈추고 떠나는 용기

  추진력은 설렘이 동반될 때 배가 된다. 약간의 변동성을 허용한 채 일정하게 굴러가는 일과, 그에 따라 큰 울렁임이 없는 감정 속에서 체내에 쓰인 수많은 생각들이 독해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갔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이 소리침들을 꺼내볼 용기가 없었을뿐더러, 그것을 마주하는 타이밍으로 반복되는 시간 중 어느 부분을 골라야 할지도 큰 과제였다. 그래서 미루고 또 미뤘다. 딱히 몸이나 정신 따위가 약해져서 휘청이는 건 아니었다. 담담한 하루들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저 밑에서 툭 하고 올라와버린 생각이었다. 


'다음 주에 혼자 떠나야겠어. 정리를 좀 해야겠다.'


  머릿속이 어수선할 땐 꼭 방의 상태도 어수선하곤 했다. 혼란스러움의 정도에 따라 방청소의 스케일이 달라졌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방은 정상이었다. 어수선한 건 나였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시선을 허공에 두면 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 낯선 공기는 익숙한 공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신선함과 활기를 가져다줄 거라 믿었다. 단순히 심심해서 해보는 다짐은 아니었다. 외면하던 생각들이 뭉쳐 단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렇게 갖은 핑계로 미루던 여행을 온갖 핑계로 떠났다.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일과를 비우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반복을 과감히 잘라내고 색다른 경험을 좇는 건 설레는 일이다. 숙소는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검색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두 군데를 이틀씩 예약했다. 마지막 날은 공항 근처 호텔로 잡았다. 한 곳은 애월, 한 곳은 서귀포였다. 일정은 없었다. 그냥 떠났다. 한 가지 정해진 건, 한적한 마을에 가만히 있기. 





여행 1일 차.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이곳, 제주는 늘 푸르렀다. 

예측되지 않는, 예측하지 않을 6일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혼자 국내여행은 처음이다. 국내여행의 매력은 낯선 곳에서도 말이 통한다는 점이다. 최대한 다양한 문장들을 나누고 돌아가고 싶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곧 도착인걸 보니, 느낌이 좋다.

여행의 목적은 '나를 찾기'. 색다른 공기가 신선한 생각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차가 없는 여행은 나름대로 그 매력이 있다. 도로의 흐름을 발끝으로 느껴보고 도착지에 다다르기까지 풍경을 찬찬히 눈에 담을 수 있다. 멈춰 설 때마다 달라지는 빛과 풍경은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감사하게도 버스를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버스가 달리는 해안도로는 낯설고 아름다웠다. 왼쪽 오른쪽 앞쪽을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1일 차 여행객과 달리 그런 풍경이 익숙한 듯 앞을 보는 사람들마저 좋았다. 아, 나 제주에 있구나. 실감을 되새겼다. 



  제주에서 노을이 질 정도의 저녁시간에는 모두가 하루를 정리한다.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다. 그래도 첫끼인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중간에 내려 유명하다는 전복내장 김밥집을 들렀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김밥집을 향하는 것도 즐거웠다. 캐리어의 바퀴가 계속해서 굴러가지 않았다. 걸음마다 멈춰 서서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서 한 손에는 김밥 봉지를 든 채 숙소에 도착했다. 낯선 돌담과 건너의 바닷 풍경. 아기자기한 독채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었다. 카페 혹은 공용공간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에 들어서자 포근하고 습한 소파 냄새, 나무 냄새가 섞여 났다. 동화에서나 볼 법한 빈티지스러운 소품들과 가구들. 도미토리 중 내 자리도 마음에 쏙 들었다. 짐을 놓고, 간단히 씻고, 숙소 내 카페에 들어가 김밥을 열었다. 숙소에서 카페까지 가는 다섯 걸음 정도의 순간에는 비릿하고 시원한 바다내음이 코를 찔렀다. 동화 같은 곳이다. 


  

  스물넷의 스탭분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김밥을 나눠먹었다. 한 분이 더 오셨다. 나와 동갑의 나이였다. 그러나 뭔가 범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스탭분으로 착각할 정도로 이 공간이 편안해 보였다. 서른 후반 같은 세상을 이미 좀 겪어본 듯한 말투와 낯선 이를 대하는 태도. 사실, 김밥 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맛은 분명 있었는데, 그 외에 모든 감각들이 집중되어 미각이 날카로울 수 없었다. 그렇게, 스탭분이 숨겨둔 맥주들과 함께 밤새 수다가 이어졌다. 낯선 여자들의 만남. 맥주 한잔에 어색함은 사라졌다. 내가 꿈꾸던 혼자 여행은 이런 맛이었다. 모두가 계획이 없는 여행자들이었다. 

아직은, 적응 중이다. 내일은, 조금은 더 편안하길. 


                            롱타임노씨,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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