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다
말하기에 두려움이 있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길지 않았던 인생에 그동안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던 사건 중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사적인 상황에서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말을 잘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활발하긴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에 가까우며 사람들 사이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었을까?
중학생 때까지 나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 때 "오늘이 며칠이지?"라고 물어보는 순간 그 날짜가 나의 출석번호가 연관돼있다면 그때부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제발 걸리지 마라...'라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운이 나쁘게 내가 걸리게 되면 일어나서 발표하는 건 더더욱 힘들었다. 앉아서 말을 한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반 아이들이 잘 모른다. 부끄러움을 조금은 숨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선생님의 "일어나서 얘기해 볼까?"라는 말에 나무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는 순간 바닥과 부딪히며 나는 찌릿한 굉음과 함께 모두가 나를 주목했다. 사실 순간의 시선일 뿐 나의 발표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앉을 때까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고 싶은 말을 제때 하고 싶었고, 남들이 주는 관심에 비해 혼자서 오버하는 것 같은 초라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었다.
고등학교 배정 소식을 전달받는 날이었다. 같은 중학교의 아이들이라면 으레 가는 고등학교가 정해져있었다. 공학은 이 학교, 여고는 이 학교, 남고는 이 학교. 그렇게 대략 3개 정도의 후보군이었다. 1지망과 2지망을 적어서 내긴 하지만, 소위 뺑뺑이라는 제도에 맞추어 어디까지나 랜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학군이 분포한 동네였다. 그리고 나는 우리 중학교 여자아이라면 당연히 가는 여고의 옆집에 살고 있었다. 엄마도 그 명문이라는 여고에 나를 보내기 위해 5년 전 아등바등 이사를 온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 자 00이 꺼." 처음 보는 학교 이름이었다. 이게 어디 있는 학교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전교에서 딱 3명이 이 학교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하니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나를 위로하고 동정했다. 거기엔 불량한 아이들이 많은 학교라 공부는 무슨 적응을 하긴 힘들 거라는, 힘내라는 이야기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그게 큰 문제였나 싶겠지만, 사춘기 중3 여학생에게는 모든 친구들이 나만 빼고 같은 학교를 간다는 것과 가고 싶었던 학교를 못 갔다는 것, 그 학교가 다수에게 환영받지 않는다는 것이 굉장히 비참한 현실이었다.
그해 겨울방학에는 고등학교 학업 부담감에 대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대학생 때까지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잘 해내야 한다'라는 부담감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굉장했다. 그래도 그때가 정신적으로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 감정을 돌보기에 너무 미숙한 아이였다. 충분히 힘들어 보이는 부모님께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중학교 담임선생님께 거의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연락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카페에서 마주 앉아 몇 시간을 눈물 콧물 범벅으로 울고 나니 엉키듯 꿰매져 마음을 옥죄었던 실밥들이 투두둑 뜯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결정적으로 힘이 됐다. "너 누구보다 잘하면서 왜 겁을 먹어. 가보면 별거 아닐 거야."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갔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상황을 오히려 재밌게 써보고 싶어졌다. 게임에서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느껴졌다. 등교 첫날 아침, 남색 교복으로 가득 찬 등굣길 한가운데 홀로 갈색 교복을 입고 걸었다. 그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학교가 가고 싶을까?'
재미있는 일이 있다면 학교가 가고 싶을 것 같았다. 그리곤 이 학교에서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회장을 해야겠다.'
당시 학급 회장 선거는커녕 발표조차 힘들었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언젠간 부수고 싶었다. 그래야 바뀔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1학년 4월, 전교생 앞에서 연설을 하고야 말았다.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나를 소개하는 전 학생회장 언니의 당당한 모습을 보았다. 나와 다른 사람으로 느껴져 존경스러웠다. 지금 간신히 호흡을 고르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환호와 박수 뒤에 적막이 감돌았다. 모든 곳이 환했지만 조명의 열기가 느껴졌다. 무대가 너무 커 보였고 나는 정말 작았다. 한걸음 뗄 때마다 느껴졌던 미끄러운 무대의 감촉이 생생하다. 심장이 1m 앞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고 두 다리는 간신히 몸을 버티고 있었다. 땀이 흥건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나는 변화했다. 무대에 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눈빛은 곧아졌고 목소리에 자신감이 생겼다.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내가 우러러봤던 그 학생회장의 선배처럼 여유롭게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어디서든 리더의 자리를 맡았고 마이크가 있는 곳이면 달려갔다.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희열이 느껴졌다. 일상에 생기가 돌았고 성격도 훨씬 밝아졌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나의 소심했던 과거를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공부에 소홀한 분위기인 학교는 맞았다. 하지만 나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은 공부가 다가 아니었다. 매사에 부딪혔고, 발전했다. 마음이 맞는 많은 친구들과 늘 함께하며 3년간 아낌없이 나를 발굴해나갔다.
명문 여고에 진학한 친구들은 점심을 거르며 공부에 매진했다.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학교 분위기는 성적에 따라 좌우되었고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하는 시간은 사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론 우수한 명문대에 진학한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늘 움직이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나를 보며 '학교 정말 잘 다녔다'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많았다.
글쎄. 나도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어쩌면 훨씬 좋은 대학입학장을 안고 졸업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꾸준한 연습으로 한계를 탈피하는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고 스스로의 능력을 한계 짓지 않게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도전하는 게 두렵지 않다. 늘 어려운 상황일수록 색다른 기회를 만들 수 있었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부딪혔을 때 생각보다 잘 해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혼자 이름모를 학교에 배정된 것에 감사하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을 바꿔준 큰 사건이었다. 특히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게 된 것은 나에게 엄청난 기회들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감 있게 대화하면서 좋은 평판과 함께 도움 되는 일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사고력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이 생겨 집에 돌아와서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일이 없어졌다.
만약 당신이 말하기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바뀔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와는 다른 재질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학생회장 언니를 바라봤던 내가 사회에서 말을 잘한다는 강점을 활용해 아나운서가 되었으니 말이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 굳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큰 무대 앞에 설 필요가 없다. 주어진 환경에서 꾸준히 올바른 방법으로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말하는 게 어려운 사람들의 고충을 겪어봤기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도록, 첫 걸음부터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드리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