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을 다닐 때 즈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할머니를 따라 노인정을 자주 갔었다. 할머니 옆에서 화투도 배우고 어른들이 하시는 이야기도 종종 같이 들었다. 물론 점당 10원짜리 내기에서 100원을 두고 싸움이 나는 순간도 있었기에 몸은 잘 사려야 했다.
그날은 아마 낙엽이 지는 늦가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노인정을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찬바람이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할아버지 한분이 현관 앞 화단에 혼자 앉아 계셨다. 하늘은 맑았고 그 옆을 지나는 낙엽들은 자기들끼리 돌아다니기도 어딘가에 안착해 잠자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눈은 허공 그 어딘가를 보고 있었으며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 썰렁하지만 어딘가 묘한 표정을 가만 바라보다 할머니를 따라 집을 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던 그때는 인생의 황혼을 훌쩍 넘긴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 표정을 모방할 수도 모두 이해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을 다 맺고 나서 겨울을 향해 가는 그 계절과 너무나 절묘히 어울려 늦가을의 일부만 같았던 한 남자를.
점차 새로운 것보다 걸러내고 덜어내야 하는 때가 왔음을 직감한 지금은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누려보고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어떤 감정이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덜어내고 난 후,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언젠가 그런 표정을 지은 채 자연에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