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의 문법이 바뀌는 순간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웃긴 여자 좋아해요. 얼굴 안봐요.”
서정원의 칼 같은 대답에 혜루의 동공이 확장된다.
혜루는 ‘남자들 앞에서 웃기려고 하지마. 남자들 앞에선 예쁘게 웃어주면 돼.’라고 말해주던 연애고수 언니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웃기려고 하는 여자 부담스러워요. 안 웃기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감해요.’라고 손사레를 치던 남자들의 피곤한 표정도 이어졌다.
혜루에게 서정원의 말은 그동안 ‘남자들의 이상형’이라고 여겨왔던 문법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한테 이렇게 말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눈빛으로 정원을 바라보던 혜루가 입을 뗀다.
“왜요? 남자들은 보통 예쁜 여자 좋아하고 웃긴 여자 싫어하던데..”
“웃으면서 즐거운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게 좋아요. 예쁜 여자들은 자기가 예쁜 걸 알고 계속 그 말 해달라고 해서 피곤해요.”
혜루는 ‘예쁘지 않아도 돼. 함께 웃는 게 좋아!’라는 서정원의 마음에서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전 마음을 봐요. 함께 있을 때 자유롭고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혜루는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다가 서정원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잘생긴 남자 좋아해요!”
순간! 서정원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웃는다. 자기 얘길 한다는 걸 안다.
서정원은 회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직원이다. 속눈썹이 길고 눈이 아름다운 이 남자는 정대만 같기도 하고, 프랑스 미남같기도 한 묘한 인상을 준다. 주6일 헬스장 출근과 매일 1시간씩 산책으로 단련된 몸매는 셔츠핏에서 드러난다.
“미남이시네요! 특히 눈이... 너무 아름다우세요!”
혜루가 명랑하게 말했다. 고백이 아니라 감탄이었다. 첫인사에 대뜸 미남 타령이라니, 서정원은 당황하면서도 그녀가 건넨 명함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여직원들은 탕비실에서 서정원의 훈훈한 외모를 얘기하느라 바쁘고, 지수대리는 서정원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져도 그는 무심하고 시크하게 응수한다. 마치 서태웅처럼. 엘라스틴 머릿결을 찰랑이는 그를 보며 혜루가 말했다.
“머리숱이 아주 풍성해보이세요. 평생 탈모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서정원은 자신은 머릿발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리고 ‘순도 100% T 성향’이라고도 덧붙였다. 혜루는 그를 순백의 T라 불렀다.
서정원과 혜루는 다른 팀이었지만 같은 프로젝트를 맡으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둘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서정원이 혜루를 위해 맥주를 사주겠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 많았다고.
제로콜라를 마시는 서정원과 생맥주를 마시는 혜루. 한 잔, 두 잔, 세 잔. 두 사람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 헤어진 연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어느덧 밤 10시 반.
혜루가 슈렉 고양이 같은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입을 뗀다.
“저.. 과장님..”
서정원이 잔뜩 긴장한 채로 혜루를 바라본다.
“맥주 한 잔만 더 마셔도 될까요?”
순간 빵 터진 서정원은 큰 소리로 웃더니 “알겠어요!”라며 생맥주를 주문한다. 정원이 사는 맥주인지라 혜루는 눈치가 보였던 것.
두 사람은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혜루가 또 묻는다.
“고양이 같은 여자가 좋아요? 강아지 같은 여자가 좋아요?”
“강아지! 리트리버 같은 여자가 좋아요. 고양이는 너무 똑똑해.”
“그럼 전 강아지 같아요? 고양이 같아요?”
서정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양이. 똑똑해서 사람들한테 잘 안 속을 것 같아요.”
빙고! 혜루는 ‘순백의 T 맞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뒷맛은 어쩐지 씁쓸했다.
‘자기 이상형은 강아지라면서.’
밤 11시.
마지막 잔을 마시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서정원을 굳이 마다하며 지하철을 타는 혜루였다.
다음날, 회사.
회의실에 미리 와 있던 서정원을 본 혜루는 황급히 눈을 피한다. 뒤늦게 혜루를 발견한 정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혜루는 이번에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한다.
‘눈을 못 보겠어.’
사람들의 눈을 잘 보기로 유명한 혜루는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럽다.
‘처음엔 그저 아름다운 생명체에 대한 감탄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마음이 생겼지?’
혜루는 심장에 가만히 손을 대본다.
그날 회의는 3시간 풀타임으로 진행되었고, 혜루만 추가로 1시간 더 회의를 했다.
그런 혜루를 기다리고 있던 정원. 이번에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서정원의 말에 혜루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너무 지쳐서 지하철 역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다.
차 안.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아니, 말할 기력이 없었다. 혜루는 정원의 눈을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을 던진다.
“저 다이어트 할 거에요. 서과장님도 한달에 8키로 빼봤다고 하셨죠? 제가 지수대리한테 그 얘길 했더니 한마디 하더라고요.”
혜루가 지수대리 성대모사를 하며 말한다.
“서과장님은 운동 좋아하세요.”
빵 터진 서정원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얼음장 같던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펼쳐지자 차 안 공기마저 바뀌는 듯 했다. 정원이 혜루를 위해 틀어놓은 엉뜨의 따뜻함까지 온기를 더한다.
혜루의 집에 가까워질 무렵, 서정원이 툭, 말을 꺼낸다.
“결혼했어요?”
혜루는 깜짝 놀라 정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니요.”
“결혼 생각 있어요?”
훅! 들어오는 서정원의 질문에 혜루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시한번 정원을 바라보자, 그는 이미 혜루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