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만을 찾아서

한 겨울밤의 슬램덩크

by 파롤


“전 슬램덩크를 좋아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서 2회 차 정도 시간 끄는 거 안 좋아해요.”


재성의 말에 혜루는 순간, 마음속에 훅 들어오는 3점 슛 한 방에 철렁한다. 한 템포 쉰 후, 그녀는 말을 보탰다.


“안경 선배가 3점 슛 쐈을 때, 2회 걸렸죠.”


재성은 지겹다는 표정으로 끄덕끄덕한다. 누군가가 큭큭 하고 고개를 숙이며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광경. 어느 독서 모임이었다.


2주 후, 우리들은 포틀럭 파티에서 다시 만났다. 연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아늑한 공간에서, 포근한 소파에 앉아 와인 여러 잔, 테킬라와 레몬 한 즙을 삼킨다. 취기가 오른 그때, 혜루가 재성에게 말을 건넨다.


“슬램덩크 좋아하세요?”


알면서.


재성은 빙긋 웃으며 송태섭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혜루의 눈빛이 또 한 번 반짝인다. ‘찾았다!’


“그럼 난 강백호! 이제 정대만만 있으면 완성인데! 저 개그라인 좋아해요!”


재성은 말을 더 잇지 않고 그냥 웃는다. 신이 난 혜루가 옆에 앉은 홍강에게 “누구 좋아해요? 정대만?!”이라고 묻자, 그가 덤덤하게 답한다.


“채치수요.”


아.. 실망한 혜루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대각선에 앉아 우리의 대화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던 민국을 바라봤다.


“정대만?!”


‘제발 정대만이라고 말해줘’라는 바람으로 간절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그가 너그러운 미소로 답한다.


“안선생님이요.”


아.. 혜루는 헛헛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는 듯 탄식한다.


‘불꽃남자 정대만은 남자들의 로망 아닌가? 대체 정대만은 어디에….’


좀처럼 개그라인 완성이 안 되는 상황이 답답한 혜루는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좋아한다고 말한 슬램덩크 캐릭터와 그 자신이 꽤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혜루는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에 앉은 남자들은 전부 'T'들이었다. 이른바 T존에서 혜루 혼자 불꽃남자 정대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 줄기 빛이라면, 재성은 정대만의 얼굴을 닮았다. 인상이 좋은 재성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키가 작다. 로맨스에 진심이라 이한나에게 순애보를 보여주는 송태섭과 꼭 닮아 보였다.


재성은 다정한 면이 있었다. 이날 파티에서는 책교환 이벤트가 있었는데 재성은 만화책을 들고 왔다. 한 권만 가져와도 되는데 가격이 저렴해서 미안한 마음에 두 권을 준비한 재성이었다.


포틀럭 파티라 각자 와인 1병씩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재성은 3병을 꺼내 놓았다. 그중 한 병은 혜루가 가장 좋아하는 키안티 클라시코.


혜루도 주문했으나 파티 일정이랑 안 맞아서 못 가져온 와인이었는데, 눈앞에 놓이자 깜짝 놀란다. 혜루가 에세이에서 언급한 와인이라 한 병 더 마시게 해주고 싶었나 보다.


홍강은 채치수의 체격과 리더십을 닮았다. 그 역시 와인을 3병이나 들고 왔다. 홍강을 오래 안 멤버들은 그의 집에 놀러 가 방대한 양의 책과 와인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파티에서도 밥보다 술을 외치는 혜루가 와인을 더 사러 가겠다고 하자, 본인이 다녀오겠다고 일어났다.


와인 3병을 사 온 그에게 혜루가 감동받은 표정으로 “고마워요.”라고 하자, 홍강은 숨을 고르며 세 번을 연달아 말했다.


“청구할거야!”


이 모든 모습을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민국이다. 그는 99%의 T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표정과 말투만큼은 그렇게 인자할 수가 없다. 가히 안선생님의 지성과 푸근함에 비견할 만했다.


여자이면서도 강백호를 자칭하며 정대만을 찾아 헤매던 혜루는, 문득 물어보고 싶어 졌다.


“근데.. 강백호랑 정대만 좋아해요?”


재성이 그제야 솔직한 마음을 내뱉는다.


“강백호 안 좋아해요. 너무 성장형이라. 정대만도. 너무 열정적이야. 난 사실 서태웅을 제일 좋아해요.”


홍강도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서태웅이라고 말한다. 혜루에게 ‘개그라인을 만들고 싶으면 서태웅부터 찾아야 하지 않느냐’며.


‘참나. 진작 말하지.’


정대만을 못 찾았을 때보다 이 속마음을 들었을 때 혜루는 더 공허해졌다.


‘우린 몇 시간 동안 뭘 한 거지?’


그들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묻기 전까지는 별말 없이 혜루의 바보 같은 질문과 외침을 견뎌주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면적 좀 차지해도 되겠습니까~?”


라며,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혜루에게 차마 가라는 말도 못 하고, 자리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혜루가 제발 그 이야기를 멈춰 주길 바랐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딱히 뭐라 하지도 않고 그냥 같이 와인을 마시고 얘기를 들어주고 화제를 바꾸지도 않았다.


혜루의 대화 주제만큼이나 주량까지 맞춰주던 재성과 민국은 결국 무릎 담요를 목 끝까지 덮고 고이 잠들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홍강은 두 사람이 참 잘 자더라며 단톡방에 안부 인사를 남긴다.


‘개그라인이 뭐 별 건가. 정대만 없으면 어때, 서태웅 없어도 괜찮다.’


혜루는 그 한 겨울밤의 슬램덩크 삼매경이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 친구들이랑 ‘넌 누가 제일 좋아? 난 누구!’라고 말하며 캐릭터 열전을 펼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성인이 되고 필요한 책들을 골라 읽으면서 점차 잊혀져 가던, 우리들의 슬램덩크.


혜루는 슬램덩크 얘기로 한참을 대화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꿈만 같았다. 그녀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정대만이라는 퍼즐, 바보처럼 귀여운 개그라인의 완성은 어쩌면 그 밤에 이뤄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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