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는 맑은 눈과 예쁜 미소를 가지고 있다. 차분한 성격에 말 수가 적고 경청을 잘한다. 한마디로 인상이 참 좋다.
승희가 회사에 입사했을 때, 직원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상사와 어린 직원들도 모두 그녀에게 다가왔다. 점심시간. 자연스럽게 여자 그룹이 그녀를 에워쌌다.
“승희 씨는 인상이 너무 좋다. 착해 보여. 점심은 우리랑 같이 먹자.”
승희는 첫 회사의 기억도 떠올랐지만 이곳은 다르기를 바랐다. 그곳에 재희가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도 누군가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여직원들은 도시락을 싸 오거나 점심을 사 와서 탕비실에 모였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앞으로 남자들은 개새끼라고 불러.”
승희가 깜짝 놀라 은정을 쳐다봤다. 보미가 태연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나현이와 지은이도 거든다.
“미친 새끼들이야. 업무 시간에 담배나 피우러 다니고.”
“여직원들을 얼마나 음흉하게 쳐다보는지 알아? 회식 때만 되면 발정 난 개들처럼 여자만 찾는다니까.”
“창윤이 그 새끼는 얼굴은 반반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결혼을 했더라고. 그러면서 맨날 자기 마누라 욕만 해. 미친놈.”
그녀들의 욕은 점심시간 내내 꽉 차게 이어졌다. 입사 첫날,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것도 당황스럽고 회사 동료를 저렇게 욕하는 것도 놀라웠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승희의 점심시간은 끝이 났다.
업무 시간이 되자 그녀들은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은 그러려니 하는 눈빛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승희에게 메신저를 보내기 시작했다.
“승희 씨, 나 창윤 팀장이야. 오늘 저녁에 환영식 겸 맥주 한 잔 어때?”
“안녕하세요. 이정훈 대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따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안녕하세요. 앞으로 승희대리님과 함께할 장민석 인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창윤팀장님이랑 술자리에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남자들의 메신저에 어떻게 응대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입사 첫날부터 술자리는 좀 불편한데.. 확정된 것처럼 함께하겠다는 인턴의 말에도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네. 정훈 대리랑 먼저 얘길 나눠봐야 하나?’
오후 3시. 승희와 정훈이 나란히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정훈은 마치 업무 알려주기 위해 온 사람처럼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승희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들 이상하죠?”
승희가 깜짝 놀라 정훈을 바라봤다.
“여기 좀 그래요. 여자들은 모여서 남자들 욕하고 남자들은 또 담배 피우러 몰려다니면서 여자들 욕하고. 남혐 여혐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라니까요?”
승희는 정훈을 다시 바라봤다. 마치 이곳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대리님은 어떤 스타일이세요?”
정훈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여기저기 맞장구 쳐주면서 지내요. 여자들이 남자들 욕하면 거기에 맞장구 쳐주고 남자들이 여자들 욕하면 또 거기에 맞장구 쳐주고. 편하잖아요.”
승희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의문의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지내면 정말 편해요? 전.. 힘들 것 같아요.”
정훈이 씁쓸한 표정으로 승희를 바라봤다.
“사실 저는 양 쪽 다 싫어해요.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하고 여자들 무리에 끼지도 않죠. 그냥 회색지대예요. 그런데도 양쪽에서 다가오면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서 사회생활 하는 거죠.”
승희는 정훈을 보며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저도 그렇게 사회생활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정훈이 승희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쉽지 않을 거예요. 말이 회색지대지. 전 자기들 무리에 안 낀다고 양쪽에서 욕먹어요.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미움받을 용기로 버티는 거죠.”
정훈이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승희도 조금은 함께 미소 지었다가 퍼뜩 현실을 깨닫고 말했다.
“팀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회식을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답해야 하죠?”
정훈이 살짝 고민하다가 답했다.
“팀장님은 술자리를 좋아해요. 첫날부터 미움받을 필요는 없죠. 오늘은 일단 같이 가요. 저 술 못 마시는 거 다 아니까 저처럼 술 못 마신다고 하고 제 옆에 있어요. 눈치껏 있다가 일찍 일어납시다.”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턴도 함께 간다고 하던데.. 우리 넷만 가는 거예요? 다른 여직원들은..”
정훈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승희에게 말했다.
“여직원들한텐 말하지 마요. 아마 난리 날 거예요.”
승희의 큰 눈이 더 동그랗게 커지자 정훈이 말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딱 보면 알잖아요. 창윤 팀장님, 저, 민석 인턴.”
승희가 세 사람을 나란히 떠올리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미남?”
정훈이 피식 웃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승희 대리님 전임자가 왜 나갔는 줄 알아요? 주미 씨라고, 승무원 출신이라 엄청 예뻤어요. 그래서 창윤 팀장님이 일은 안 시키고 우쭈쭈 하면서 매일 술 사주니까.. 여직원들이 오피스 와이프라고 소문내고 괴롭혀서 나간 거예요.”
승희는 들려오는 이야기들마다 기가 막혔다.
“다들 첫날부터 저한테 너무 겁을 주는 것 같아요.”
정훈은 겁에 질린 승희의 표정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 동물의 왕국 맞아요. 오늘은 예방 주사 맞았다고 생각해요.”
승희는 예고된 재앙 같은 앞날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