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목소리

by 파롤

글을 보여주는 마음은 언제나 수줍다. 살짝 가린 속살 같은 얼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화장을 잘 못하는 나는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내 예쁜 부분 하나를 발견해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어느 글쓰기 모임에 놀러갔는데, 예쁜 사람들이 반갑게 환영해주어서 얼어붙은 내 발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 글을 보고 육성으로 웃었다고 댓글을 써준 분과 눈인사도 하고, 감동받은 그의 글 제목을 나지막이 불러보기도 했다. 눈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신나게 놀았던 1부가 끝났다.


합평의 2부. 두 조로 나뉘어 방을 옮긴 나는 데워지지 않은 방의 찬기에 깜짝 놀랐다. 그때 같은 방에 들어온 멤버 한 명이 리모컨을 만지작 거리며 온도를 체크한다. “춥지 않으세요? 겉옷을 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중 가장 어려보이는 그 친구는 호수처럼 크고 깊은 눈을 가졌다.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에 상냥함을 더한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마치, 키가 큰 어린왕자 같다.


이제 막 온풍기를 켠 상태에서 합평이 시작되었다. 세 번 째. 대망의 내 순서. 어떤 말을 듣게 될까? 두근두근. 하지만 이어지는 건 회초리처럼 내 종아리에 새겨지는 핏자국의 말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마치 화가 난 여왕님 같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빼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도! 앞뒤 문장이 말이 안되잖아. 이런 결론은 쓰는 게 아니야! 이런 말 정말 싫어!”


내가 소중히 쓴 마음의 줄기들인데, 무자비하게 질책하는 그녀의 말을 받아 적던 나는 이윽고, 손이 멈춘다. 순간,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내가 너무 지적만 했는데.. 너무 재밌어! 아니 별 일도 없는데 진짜 너무 재밌어서 집에 가서 남편한테 얘기할거야!”라고 말하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그래요?” 나는 순간, 그녀의 오락가락하는 감정에 찢겨지고 펼쳐지는 내 글의 잔상을 본다.


그렇게 쉽게 써 내려간 글이 아닌데..


“여러분이 말씀하신 내용을 다 담으려면 제 글이 너무 길어져요. 전 읽는 사람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쉽게 읽히고 재미있게 쓰려고 해요. 물론! 제가 필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면 길어도 단숨에 읽힐 만한 글을 썼겠죠. 근데 제가 그럴만한 필력이 안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함축하고 함축해서 쓴 거에요.”


내 글을 변호하는 모습 앞에서 6천자의 여왕과 1만자의 여신이 말을 멈춘다. 1만자의 여신은 더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려다 잠재운다. 정적의 시간. 6천자의 여왕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할 말 없냐고 묻자, 어린왕자의 얼굴을 한 이가 용기 내어 한 마디를 꺼낸다.


“저는.. 따뜻하다고 느꼈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당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호수처럼 크고 깊은 그의 눈빛에서 연민과 위로가 담겨 보였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 참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나는 내 글이 너무 소중해서 너의 글도 소중하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쉽게 지적하지 못한다. 얼마나 아플지 아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다정한 마음뿐이다.


나는 어린왕자를 바라본다. 그는 계속 리모컨을 만지작 거리며 방안 공기를 살핀다.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하다가도 너무 더워지면 이야기할 때 답답해질까봐 중간중간 조절해가면서 방안의 온도를 가장 온화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가장 어려보이는 친구가 가장 속이 깊다.


합평이 끝나고 모임 소감을 말하는 시간. 찬기와 온기가 스쳐간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저기, 어린왕자가 보인다. 내 차례가 왔다.


“저는.. 쉽게 읽히고 재밌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모임을 통해서 내면의 이야기를 더 깊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순간이 소중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좋은 모임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임에 속해 있는 어린왕자와 댓글로 내 글을 재밌다고 말해주었던 사람, 내 결론을 의미있게 생각해준 이에 대한 보답이었다. 내 상처가 이 모임을 얼룩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6천자의 여왕과 1만자의 여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린왕자의 차례. 그는 이 모임에서 글쓰기의 성장속도가 빠른 인재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일취월장하는 그의 글을 보며 사람들은 기대감을 잔뜩 담아 물었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어린왕자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말한다.


“전.. 진솔한 이야기가 가장 재밌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확신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저는 재밌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어요!”

라고 한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미소지었다. 왜, 좋았을까. 딱히 나를 향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내가 추구하는 ‘재미’라는 단어 하나를 발견한 것에서 묘한 반가움이 일었다. 어쩌면, 저 속 깊은 어린왕자가 내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거둬내고, 미소 하나를 발견해 주는 듯한 기쁨이었다.


계속 따뜻하게 나아가라고, 그냥 재미있게 이야기하라고. 방 안 온도를 맞추듯 내 글의 온기를 맞춰준 것만 같아서.. 나는 그 첫눈 내리던 날의 따뜻함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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