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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식 Apr 04. 2020

당신의 프라이팬은 안녕하십니까

다크 워터스, 2019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생후 100일이 채 되지 않은 아기의 폐가 굳었고, 엄마는 같은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정부에 신고한 피해자는 6,757명, 그중 사망자는 1,532명이다. 이때 우리는 배웠다.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잘못을 입증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2016년 4월 25일 시작한 4차 피해조사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지원 종합 포털)


영화 <다크 워터스>는 그때와 판박이다. 어벤져스의 헐크로 친숙한 배우 마크 러팔로는 한 기업이 독성물질을 유출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는다. 환경운동가로 알려진 그는 사건의 심각성에 큰 충격을 받고 영화를 제작한다. 기업에 맞서 싸우는 실제 인물 롭 빌럿 역을 맡았다.


롭 빌럿은 화학기업을 전담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다. 어느 날 그에게 한 농부가 찾아온다. 집 근처에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고 젖소가 연달아 죽는다며 하소연한다. 무작정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상대방의 행동에 롭은 당황한다. 알고 보니 그는 할머니의 이웃이었다.


빌럿은 고향으로 돌아가 현장을 둘러본다. 농장에서 키우던 젖소 190마리가 죽었다. 살아있는 소들은 사람에게 달려드는 괴이한 폭력성을 보였다. 다시 만난 농부는 정상 크기의 두세 배로 불어버린 소의 장기들을 보여주며 기업의 잘못을 주장한다.

변호사 롭 빌럿이 농부 윌터 테넌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롭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확신한다. 어떤 폐기물이 버려졌는지, 매립된 물질에 독성이 있었는지, 관련 서류를 검토하면서 차근차근 추적한다. 하지만 화학기업은 비협조적이다. 전화를 피하고, 요구한 자료를 건네주지 않는다. 자연스레 의혹이 커지고 롭은 사건 깊숙이 개입한다.


그 기업은 미국의 대표 화학회사 '듀폰(DUPONT)'이다. 근대 화학의 창시자 라부아지에의 제자 듀폰이 프랑스혁명 중 망명하여 설립한 기업이다. 그들이 만든 화학 물질은 자동차, 건축, 운동기구, 전자기기, 보호의류 등 모든 곳에 사용된다. 영화 속에서 문제가 된 물질은 'PFOA'다.


PFOA는 과불화옥탄산(perfluoro octanoic acid)을 말한다. 탄소와 불소의 강한 공유결합 형태로 이뤄진 과불화합물 중 하나다. 입, 호흡기, 피부를 통해 체내로 흡수되며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식품의약안전처는 해당 물질이 동물 발암성 시험에서 간, 고환, 췌장 등에 종양을 발생시켰다고 밝혔다.

일명 '테플론'으로 불리는 PTFE는 프라이팬이나 냄비 등의 코팅에 사용된다.

프라이팬 발암물질 논란의 주인공 또한 PFOA다. 테플론으로 코팅된 프라이팬을 가열시키면 사용자는 기화된 PFOA에 노출된다. 지금은 430℃의 제거 과정을 거친다지만 검출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PFOA는 수많은 제품의 코팅에 사용된다.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발생하는 환경호르몬도 PFOA다.


듀폰은 그 PFOA 폐기물을 몰래 땅에 묻고 강에 버렸다. 일대 주민과 직원은 암에 걸렸고 임산부는 유산했다. 동네 아이들의 치아는 검게 변색됐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화학물질이 식수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말을 빌려서 질문한다. 어떻게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50, 60년 동안 배출했을까?

조사를 방해하려고 듀폰이 대량으로 보낸 자료를 롭 빌럿이 분류하고 있다.

마크 러팔로는 환경오염의 위험성만큼 피해를 신고하기 힘든 현실을 전한다. 기업과 지역 사이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공장이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주 시민들이 듀폰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어려운 이유다. 나서더라도 비전문가인 농부가 전문가의 잘못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


국가는 시민을 대신해 기업을 관리 감독해야 한다. 하지만 온갖 로비와 권력으로 듀폰은 정부 기관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공무원은 기업의 입장에 서거나 더디게 움직였다. 전문가들도 침묵했다. 후미진 시골에서 젖소를 키우는 농부의 울분은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자기의 억울함을 들어주지 않을 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가야 할까. 기자와 변호사다. 기자는 여론을 움직이고, 변호사는 법을 움직여서 정의를 바로 세운다. 롭 빌럿은 1998년부터 2015년까지 법정투쟁으로, 뉴욕타임스는 2016년 특집기사로 정부의 역할을 대신했다.

롭의 부인 사라와 로펌의 대표인 톰 터프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둘은 끝까지 롭을 믿고 격려했다.

기업과의 싸움에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용기나 실력보다 운이 절실하다.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는 가족과 동료, 진실한 증인의 도움이 요구된다. 다행히 롭에게는 그것들이 있었다. 2017년, 마침내 롭은 듀폰의 범죄를 증명하고 피해자 3,535명의 보상금을 받아낸다.


롭의 성과와 달리 우리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 지원 포털은 여전히 구제 신청을 받고 있다. 기업 단체인 전경련과 경총은 비슷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만든 법안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하도록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린 <다크 워터스>에 담긴 승리의 방정식을 참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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