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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식 Feb 03. 2019

1. 귀갓길

입원일지

병상에 붙은 스티커들이 응급실의 시간을 대신한다

며칠 전 사건을 적는다. 생애 첫 교통사고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 내용이 또 다른 피해자에게 좋은 정보가 되지 않을까. 3일 전으로 시간을 돌려본다.


2019년 1월 31일 목요일이다. 오전에 비가 내려서인지 바깥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밤 8시쯤 지인들과 저녁을 먹었다. 자리는 2차까지 이어졌다. 11시가 넘어서 끝났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매우 일상적인 하루였다.


사고는 귀갓길에 발생했다. 기억은 사고 전후로 조각났다. 조금씩 돌아오는 당시의 경험을 옮겨본다.


A 사거리다. 왕복 6차로 3개와 2차로 1개가 교차한다. 한밤중이라 통행하는 차량이 적었다. 신호 대기 중이던 택시가 녹색불을 보고 교차로에 진입했다. 그 순간 우측에서 다른 차량이 달려왔다. 택시의 오른쪽을 받았다. '쿵' 소리가 성난 물결처럼 한적한 거리를 쓸었다. 나는 당겼다 놓은 고무줄처럼 조수석 뒷좌석에서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상대 차량은 오른쪽 뒷문이나 바퀴 혹은 범퍼를 친 것 같다. 운전자가 택시를 피하려고 차량을 급히 왼쪽으로 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당시를 상상하니 아팠던 오른쪽 골반이 괜스레 더욱 저린다.


나는 뒷좌석에 널브러졌다. 한 중년 아저씨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봤어. 저 새끼가 잘못한 거 봤어."라고 했다. 사고를 목격한 행인으로 여겨진다. 다른 말들은 소리만 들렸을 뿐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후 누군가 내 목에 손을 댔다.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하고서 "살아있네."라고 안심했다. 그때 느껴진 손가락의 서늘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난, 살아있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말한 것 같다.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맥박을 확인한 남성이 '괜찮냐고?' 묻는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입에선 나직한 신음만 나왔다. 눈도 뜨지 못했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다만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목소리도 스쳤다. "119에 신고해."라는 어떤 남성의 육성이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그럼. 119 신고 안 하려고 했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치였다면... 내 몸뚱이는 어떤 강에 던져졌을까?


큰 한숨이 기억에 남는다. 한 남성이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말소리로 어렵사리 "저기요, 담배 하나 주실래요?"라고 했다. 얼핏 들렸다. 가해 차량 운전자로 생각된다.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부상보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던 그의 실루엣이 내 머릿속엔 그려졌다.


한 여성이 말을 걸었다. 119 구급대원이다. 뻣뻣한 목 보호대를 채워줬다. 동료들과 택시에서 날 끌어냈다. 급히 구급차에 옮겼다. 다행히 사고가 발생한 사거리에는 소방서가 있었다. 운이 좋았다.


구급차가 달렸다. 기억의 파편을 모아 본다. 차 안에서 보호자에게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상의 기억은 없다. 시간이 점프한다. 난 응급실 병상에 누워있다. 구급대원이 눈앞에서 무언가를 흔든다. 택시기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란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응급실 의료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도, 나눈 대화도, 내게는 없는 시간이다. 몸 전체 엑스레이를 찍던 상황이 떠오른다. 교통사고 피해자의 특징인 다발성 골절을 꼼꼼히 확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보호자가 오지 않았다. 구급대원이 연락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의아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친구가 도착했다. 이후에 자초지종을 알아봤다. 보호자로 연락받은 친구는 잠자리에 들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 뒤늦게 그의 여자 친구가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 구급대원과 통화한 것이다. 그다음 자신의 친구에게, 그 친구는 다시 내 친구에게 연락한 것으로 파악됐다.


친구가 도착했다. 얼큰히 취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새로운 사실을 전해줬다. 사고 현장에 경찰이 출동했단다. 직접 해당 지구대에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었다. 옆에서 듣는데 경찰관의 대답이 시원찮은 눈치다. 경찰서로 넘길 테니 내일 교통조사계 담당관에게 연락하라는 투로 기억난다.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피해자이며 기자 생활을 하면서 경찰서를 출입했다는 말을 했다. 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한다. 부끄럽다. 사고로 정신이 없었다. 그 말을 꺼낸 이유는 경찰관이 앞서 말한 사건 이첩 과정을 잘 안다는 암시하에 질문하려는 의도였다.


대답이 달라졌다. 그의 목소리를 차분하고 친절했다. 그런 호의가 피해자인 나에게는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상대 차는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쏘카에서 빌린 렌터카다. 가해자는 신호를 위반했다. 그리고 그는 음주 운전자였다.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 수치인 0.067%로 확인됐다. 이제야 그의 한숨이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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