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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Jul 10. 2024

카메라의 기억

암실에 들어가면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곳이 암실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콧속을 자극하는 화학 물질의 시큼함과 눅눅한 습도 그리고 어딘가에서 풍기는 곰팡냄새뿐이다. 검정이 삼켜 버린 세상 속에서 내 눈에 맺혔던 세계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 암실 작업이다. 손끝 감각만으로 현상된 네거티브 필름을 확대기에 넣고 슬라이드를 비추듯 인화지에 빛을 쪼여 준다. 식초 내음이 나는 약품들을 단계적으로 거치면 마침내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는지 나타나는 것이다. 삼십 년 전 암실 안 기억들은 내 눈과 코 그리고 손끝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윤덕수처럼 6.25 전쟁이 만든 가난을 또 다른 전쟁으로 벗어나 보려 했던, 그냥 우리 시대 ‘아버지’다. 부모님은 결혼 전에 집안 차이가 제법 났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외할아버지는 군사정권이 항만에 있는 창고 부지를 환수하기 전까지 보세창고 사업과 운수회사를 운영했다. 지난 세월의 보상을 맥없이 빼앗길 수는 없었기에 군사정권을 향해 소송장을 내밀었다. 무모한 결정이었다. 예상했던 패소의 결과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소송 동안 보세창고를 사용하지 못했고, 맡겨진 물품에 대해 보상까지 해야 했다. 운영하던 두 사업을 모두 접어야 했다.

 

외할머니가 기울어진 집안 형편을 위해 선택한 것은 괜찮은 집안으로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지역유지의 아들, 무역상 그리고 의사가 사위가 됐다. 그런 외할머니가 부모도 없고 내세울 만한 직업도 없던 아버지에게 딸을 내주긴 힘드셨다. 외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곳보다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눈길이 갔다. 그렇게 베트남 전쟁 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전장에서 보낸 연애편지는 외할머니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읽지 못한 편지에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안전한 보급업무 대신 누구나 피하고 싶은 수색부대를 지원한 것이다. 수색에 투입되었을 때 아버지 앞에는 항상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도 상황이 안쓰러웠는지 행운의 여신은 외면하지 않았다.

 

다친 곳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릴 무렵 눈에 들어온 것은 카메라였다. 같이 생활하는 미군들이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버리지 못했다. 앞으로 함께할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기꺼이 월급의 두 배를 내어 카메라를 샀다. 생명을 담보로 한 전쟁의 시간은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 값과 어머니를 담을 카메라를 내주었다.


그런데 행운의 총량은 정해져 있나 보다. 아버지는 급여 대부분을 한국에 계신 바로 위 형님에게 보내어 돈 관리를 부탁했다. 기쁜 마음으로 큰아버지를 찾아간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은 처참히 무너진 신뢰였다. 큰아버지는 가족의 신뢰 대신 동생의 목숨을 담보한 돈으로, 본인이 편안한 삶을 누리는 쪽을 선택했다. 결국 남은 것은 카메라 하나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알게 된 외할아버지는 “니네가 니야까를 끌며 생활할 의지만 있다면, 내가 그 니야까를 뒤에서 밀어주마.”라며 외할머니의 반대를 무마하고 결혼을 승낙했다. 외할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었기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 뛰어들 정도로 견고한 아버지의 사랑을 읽어낸 것이다.


기억 속에 카메라로 나를 찍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는 전쟁과 큰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게 싫었는지, 카메라를 쉽사리 꺼내지 않았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에는 사진부가 있었다. 장롱 속에 묻혀있던 카메라가 생각났고 내가 본 세상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힘든 기억이 묻어있는 카메라를 건네줄 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 카메라를 처음 받을 때 이런 사연을 미리 알았다면, 쉽게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답답한 장롱 속에 갇혀 있던 카메라는 한동안 내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학 진로를 고민할 무렵, 사진학과가 머릿속에 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외가로 놀러 간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해운대 모래사장에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서 있던 카메라는 찰칵 소리도 나기 전에 삼각대와 쓰러지며 모래 속에 처박혔다. 모래를 털고 이것저것 만져 봤지만, 카메라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제야 아버지는 카메라와 관련된 지난 사연을 말하셨다. 복잡한 심경은 일그러진 얼굴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난 차마 카메라를 고쳐 달라는 둥, 새 카메라를 사달라는 둥, 떼를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진에 대한 열정도 모래 속에 파묻혔다.


그날 카메라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돌아올 무렵 큰아버지가 본인 집이 아닌 아버지 집을 마련했다면, 고장 난 카메라는 어떤 모습들을 차곡차곡 담았을까? 스페인으로 여행 가는 아버지를 위해 휴대전화를 바꿔드렸다. 지금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고집하셨지만, 오랜 기억에 남길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겠냐며 실내에서 찍힌 흔들린 사진을 내밀어 겨우 설득했다. 나 역시 사라진 열정을 대학교 사진 강의를 통해 되살리고 있다. 이제 아버지도 나도 서로가 담고 싶던 세상을 각자의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아버지 휴대전화에 쌓여 가는 사진들이 온전한 아버지만의 시선이었으면 좋겠다.


Celebration of my father’s 80th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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