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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Jun 01. 2024

흔한 결혼 27주년

대학교 4학년에 결혼한 나는 아내에게 프러포즈하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프러포즈는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레 고백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결혼은 이미 당연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혼 일 년 전 사건 때문이다.


당시 교사셨던 장인은 특유의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누군가 공짜로 가져가라는 오래된 자동차를 덜컥 받아 버리셨다. 면허증이 있는 사람은 장인어른과 아내뿐이었다. 우습게도 장인은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결국, 고물차는 아내 것이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면허증을 딴 나는 능숙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가르쳐줄 정도는 됐다. 연수를 핑계로 데이트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다. 아내의 운전 실력을 확인해 보자는 핑계로 대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 아내는 운전을 가르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핑계로 선글라스를 선물해 줬다.


대천에 다다랐을 때 거북이 같은 아내 차를 코뿔소 같은 화물차가 위협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사고는 안 났지만, 겁먹은 아내는 운전할 의지가 꺾여 버렸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내가 운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차를 갓길에 세워둘 수도, 처음 떠난 장거리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조심스레 운전해 대천에 도착했고 푸른 바다가 붉게 물들 무렵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내는 아직 운전할 상황이 못 됐다. 돌아오는 길의 운전은 내 몫이었다.


유난히 맑았던 그날, 석양은 등 뒤에서 강렬히 비치고 있었다. 눈부시지는 않았지만 선글라스를 낀 내 모습은 더 멋지게 보였을 것이다. 가끔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눴다. 순간 앞차의 뒤꽁무니가 앞유리창만큼 빠르게 커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 잡은 가족들이 연이어 나왔다. 방심한 탓도 있지만, 석양빛에 반사되어 앞차 브레이크의 붉은빛이 흐려진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선글라스. 공짜로 줄 만큼 오래된 차 상태까지. 변명하자면 그렇다.


뒷목 잡은 가족들은 한몫 잡을 요량으로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나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당시는 무보험으로 사고를 냈을 때 상대방이 합의해주지 않으면 구치소에 구속됐다. 스스로 사고처리를 할 수 없었던 우리는 각자 부모님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장모님은 청주에서 택시를 타고, 부모님은 인천에서 운전해 경찰서로 급히 왔다. 어이없게 상견례를 경찰서에서 한 거다.

 

아내는 부모님들이 오기 전까지 내가 안정되도록 배려했다. 사고는 잘 처리될 거라고, 비용은 본인이 내겠다고. '이런 상황에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 사람 마음을 정말 편하게 해 주는구나.' 그때 결심하게 된 것 같다.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패물 비용만큼 지급해야 했지만, 아내 말대로 해결이 되었고 합의금도 아내가 냈다.


경찰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으셨는지 부모님들은 이내 식사 약속을 잡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 아버지와 장인어른, 어머니와 장모님의 나이가 같다는 걸 아셨다. 술이 어우러진 대화는 어색할뻔한 자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부모님들의 만남이 서너 번 이어졌고 결혼은 당연시됐다. 한사코 안 받는다는 장인·장모님에게 합의금만큼의 금붙이를 보내는 것으로 사고를 마무리했다.


같은 공간에서 호흡한 지 27년이 흘렀다. 어디 한결같은 사람이 흔하겠는가. 결혼이라는 안정된 제도 아래서 타인보다 쉽게 생각하는 것이 부부다. 한쪽의 잘못만은 아닐 거다. 조금씩 사라져 간 아내의 여유로움을 조개 위에 그린 하트로 다시 불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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