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도보 제주한바퀴] 한국인의 '정'을 느끼다.

제주도예촌&보말과풍경

by 윤슬

3월 15일(토)

오늘은 도보로 제주 한바퀴 돌기 4일째 되는 날이다. 강풍주의보가 뜨길래 잠시 쉬었다 갈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비는 거의 안오는 것 같아서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바람이 더 강하게 불었다. 우비가 흩날려서 펄럭펄럭대는 게 왠지 웃겼다.

바닷가 위에 갈매기들도 날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추워서 그런지 금새 배가 고파졌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선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순대국집을 찾았다.

이때는 글 쓸 생각이 없어서 사진을 대충 찍었다. 뜨끈한 순대국은 추운 날씨에 속을 뎁히기 좋았다. 원래는 반찬으로 고추랑 양파도 주셨는데 내가 고추를 잘 안먹어서 빼달라고 부탁드렸다.

배도 채웠겠다, 또다시 걸었다. 서귀포시 안내판이 나오자 뿌듯하면서도 반가웠다.

가는 길에 보이던 녹남봉, 날이 좀 맑아지기도 했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올레길 코스가 표시되어 있어서 따라 올라가기 편했다.

벌써 다 올라왔나 싶었던 중턱,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

녹남봉 표지판에서 약 10분만에 정상에 올라올 수 있었다. 가볍게 오르기 좋은 봉이다.

낮은 봉임에도 불구하고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올라왔을 때 마침 햇빛이 내리쬐어 따스했다.

내려가는 길에 의도치 않게 마주친 신도저수지,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잠시 쉬었다 가기 좋았다. (그렇게 사진에 담긴 건 동자승 한 명...� 내 머리 참 둥글다.)

이제 숙소까지 남은 거리는 약 9.5키로, 2시간 30분 정도이다. 올레길을 따라 걸었지만 전날 비가와서 그런지 바닥이 꽤나 질척질척했다.

2시간 30분을 계속 걸을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그래서 중간에 쉴 곳을 정해서 목적지로 잡고 향하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를 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제주도예촌',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지만 여기서 약 1시간 정도 거리길래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측에 '제주전통도예원'이라고 크게 써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더 안으로 들어가보니 수많은 항아리들이 보였다. 그 앞에 나무 그네가 있길래 앉아서 잠시 쉬기로 했다.

그네를 타며 주변을 구경했다. 그네 뒷편에 있는 풍경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다 사장님을 마주쳤다. 여기 구경해도 되냐고 여쭤보니 흔쾌히 그렇다고 답해주셨다. 옆에 전시장도 있으니 들어가보셔도 된다고 하셨다.

건물 내부도 찍고 싶었으나 촬영 금지라는 표시가 보여 눈으로만 감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여러 도자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백발의 할머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걸어 오신거냐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셨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설명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젊은이 혼자 구경하러 온 게 기특하셨는지 옆에서 여러 설명을 해주셨다. 여기있는 도자기들은 유약을 바르지 않아서 인간과 자연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도자기의 색감은 인위적으로 칠한 게 아니라 자연이 만든 색이라고 설명해주신 게 기억에 남는다. 인간과 자연에게 해가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라,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샵도 구경했다. 거기도 아쉽지만 사진 촬영은 불가했다. 할머님께서는 구경하면서 마시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셨다. 아무것도 사지 않았어도 차를 건내주시던 손길이 따스했다. 샵 안에도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할머님께서는 그릇같은 도자기를 들더니 손으로 두들겨보라고 했다. 두들기자 도자기에선 맑은 소리가 났다. 놀라웠다. 그리곤 또 다른 모양의 도자기를 꺼내주셨다. 그 도자기에서는 좀 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도자기들끼리 부딪히니 부딪히는 면마다 제각기 다른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할머님께서는 이것이 '자연이 만드는 소리'라고 설명해주셨다. 실로 멋진 소리였다.


예전에는 이곳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축제나 홍보같은 것도 하고, 단체손님도 많이 받으셨는데 이제는 조용히 도자기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신다고 한다. 도자기는 10년 정도 하면 할만하다고 하는데, 10년 정도해도 걸음마 수준이라고 한다. 할머님께서 쌓아오신 내공은 얼마나 되는걸까? 할머님이 쌓아온 노력과 시간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할머님께서는 설명을 하시던 도중,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입구에 태극기를 세워두신거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나같은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사람이라며, 자기들은 그저 하던 일 계속하고 있는거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전통을 되살리고, 그걸 묵묵히 이어가는 모습을 보니 존경심이 들었다.


나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얼마나 가지고 있나? 괜히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이들에게 도자기 만드는 법을 많이 전수했다고 하시는데, 오래 버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길 들으니 혹여나 또다시 전통이 끊기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순간 내가 배워볼까 생각이 들기도,)

이곳은 특허를 받은 도자기만해도 60점이 넘는다고 한다. 오늘 내가 참 대단한 곳을 방문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유네스코 인증을 받은 도자기도 있었다. 도자기의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는 중국에게도 인증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그릇이나 찻잔을 구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앞으로 가야할 여정이 있으니 다음에 또 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서기로 했다. 지나가다 목마를 때 다시 들러도 좋다고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할머님이 참으로 감사했다.

그렇게 정문으로 향하던 찰나, 할머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가는 길에 향을 맡으면 좋을 것 같다며 방금 딴 민트잎을 건네주셨다. 떠나는 순간마저 따스했다.


부디 할머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란다. 별 기대없이 방문한 곳이었는데 이곳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 1시간 20분을 걸어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저녁을 뭘 먹을까 찾아보다가 혼자가도 반찬이 다양하게 나온다는 후기를 보고 '보말과 풍경'이라는 식당을 방문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에 사람이 없었지만, 사장님께서는 친근하게 맞이해주셨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을 보니 여기도 오랜 전통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내가 주문한 전복죽(12,000원)이 나왔다.

다양한 반찬들과 함께 계란 후라이는 2개나 만들어주셨다. 이 반찬들만 있어도 밥 한 공기 뚝딱할 수 있을 것 같다. 숙주 뒷편에 있는 건 냉이라고 설명도 해주셨다. 반찬들이 간이 세지 않고 적당해서 먹기 좋았다. 할머님의 음식솜씨가 아주 대단하셨다.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나 되셨냐는 물음에 30년 정도 되었다고 답해주셨다.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으셨다는 게 놀라웠다.


보말죽도 감칠맛이 나면서 정말 맛있었다. 먹는 내내 즐거웠다. 왠지 친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도 요리 참 잘하시는데, 이제는 할머니의 요리를 먹을 수가 없구나.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여기 리뷰를 보니 정식도 잘 나온다고 하던데, 기본 2인부터라 주문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다음에 누군가와 같이 온다면 정식을 먹어봐야겠다.


할머님께서는 "머리는 어쩌다 그렇게 짧게 잘랐냐"는 질문도 해주시고, 도보로 제주도 한바퀴 걷고 있다는 나의 말에 "혼자 여행와서 혼자 걷는 게 대단하다"고도 말씀해주셨다. 할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왠지 감사했다.

12,000원에 아주 훌륭한 식사를 했다. 정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정겨움'을 느꼈다.

계산 후 영수증 리뷰를 남겨달라는 사장님의 부탁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오래 장사하셨으면 좋겠다.

만족하는 식사를 했던 가게는 나갈 때 여운이 남게되어 사진을 또 찍게 된다. 문득 '쌍문동 비빔밥'이 생각났다.


우리 할머니도 항상 뭔가를 주실 때 한 개주면 정없다며 두 개를 주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나이가 들었을 때 '정겨운 할머니'가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으로 원래 분식집을 갈까하다가, 가게 시간이 애매하기도 하고 좀 더 건강한 식사를 하자해서 이 곳을 골랐는데 참 잘한 선택인 듯하다.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많이 쌓아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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