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윤 개인전: 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온수공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점인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곳에서 서로의 언저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과거 시점에서 할머니는 기억이 증발되고 있었고, 현재 시점에서 작가는 할머니가 남기고 간 흔적을 덩그러니 보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기에 기억을 초과하는 존재가 된 사람과, 존재를 잃었기에 존재를 초과하는 기억을 가지게 된 사람이 희미한 것들 사이로 전시장에 머물고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이들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기억이든, 존재든 마땅히 연결되어 있어야 할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유 덕분에, 이들은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고 있었다.
원소윤은 《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2025. 10. 12~10. 26)에서 치매가 있었던 할머니와 관련된 메모와 장면, 이야기들을 불러왔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 2층의 왼편과 오른편, 3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시장 2층에는 할머니와 관련된 메모나 장면을 그린 〈이름붙이기〉와 한순간의 분위기를 담은 〈테〉, 할머니의 유품을 그린 〈난반사〉 연작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작가가 그동안 수집해 온 장면들을 매번 다른 날, 다른 크기와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 그린 결과물이다. 각각 다른 날에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마음으로 그려진 연작들은 미묘한 차이를 변주한다. 3층에는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유산지 위에 적은 〈우리 우리〉와 〈생각〉, 2층에 이어 전시된 〈난반사〉 연작이 있다.
1. 부재를 지시하는 메모
여기에는 할머니의 망각과 그에 맞서는 기록, 상실 이후에 남겨진 것들과 애도의 감각이 공존한다. 계단을 중심으로 2층의 왼쪽에 펼쳐진 공간에는 ‘물 주지 마세요’나 ‘보리차 있음’처럼 할머니가 살아계실 당시 가족들이 적었던 메모를 그린 그림이 있다. 아마도 할머니는 자신이 식물에 물을 줬는지 안 줬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수시로 화분에 물을 주었을 테다. 이 메모들은 할머니에게 말하는 메모들이다. 계단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시점이 도래한다. 여기서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집을 정리하면서 적은 메모들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버림’, 건물의 동, 호수를 표시한 ‘130-1403’ 같은 메모들은 할머니의 흔적을 정리하는 메모들이다. 가정집의 형태를 가진 전시 공간은 메모들이 놓였던 할머니의 공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장면이나 메모를 단지 재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부재를 지시하고, 그는 작업을 통해 부재를 확인한다. 지금, 그림에 담긴 메모들은 기억 속 ‘그때’와는 다르게 기능한다. 이 메모들은 더 이상 할머니라는 수신자를 향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게 되었고, 할머니의 흔적들은 더 이상 어떤 표식을 통해 정리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목적을 잃고 남겨진 메모는 할머니의 부재를 지시한다. 메모들은 원래의 시간과 공간 밖으로 소환됨으로써 할머니가 더 이상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존재에 닿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하는 이 메모들은 상실을 충분히 애도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 할머니가 떠남과 동시에 메시지의 수신자를 잃어버리고, 표식의 근거를 잃어버린 이 메모들은 이제 새로운 수신자와 표식의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2. 기억의 특성을 닮은 관계
원래의 시간과 공간 밖으로 소환되는 것은 메모만은 아니다. 3층의 〈우리 우리〉나 〈생각〉에서 작가는 어디선가 들었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떠난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던 할머니의 글을 소환한다. 유산지에 쓰인 글들은 그것을 덮고 있는 또 다른 유산지에 의해 어떤 부분은 가려지고, 어떤 부분은 드러난다. 그 주변에는 할머니가 남긴 유품인 옷이나, ‘축 전시회’ 같은 문구가 쓰여 있는 봉투를 그린 그림 〈난반사〉가 있다. 〈이름붙이기〉나 〈테〉 연작이 옅은 채도와 명도의 색을 여러 번 덧입혀, 그려진 형상을 흐릿하게 드러낸다면, 〈난반사〉는 앞선 작업보다 비교적 선명하게 하나의 실체를 소환한다. 선명하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한 이들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매일 조금씩 변하는 선명하거나 흐릿한 기억 조각의 모음이듯이, 할머니라는 존재를 중심에 둔 기억 조각 모음이다.
각각의 연작들은 한 장면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그림으로써, 과거에 대한 다른 시간의 개입을 드러낸다. 〈이름붙이기〉 연작 중에서 순지에 그려진 그림은 재료의 특성에 따라 번짐을 일으키는데, 이는 오래되어 앨범에 눌어붙은 사진처럼 보인다. 앨범에 눌어붙은 사진이 습기 등의 물리적인 요인 탓에 과거의 장면에 흡수된 다른 차원의 시간을 보여주듯이, 그림 또한 다른 시간의 개입을 보여준다. 그 옆에는 같은 장면을 그린 또 다른 〈이름붙이기〉 연작이 있다. 작가는 기억과 작동원리가 비슷한 사진에 다른 시간이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순간과, 연작을 통해 하나의 장면에 개입되는 서로 다른 시간을 함께 보여준다. ‘기억하기’라는 행위가 과거의 한 시점을 향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현재’가 끊임없이 개입되듯이 말이다. 그의 작업은 선명하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하며, 단일하기도 계층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좁게는 연작들과의 관계에서, 크게는 할머니라는 존재에서 파생된 그림들 사이에서 기억의 특성을 연주한다.
3. 과거에 접속하며 만들어지는 그물망
과거의 것을 현재로 소환하고, 과거에 대한 다른 시간의 개입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도 과거에 접속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한 장면은 여러 번 그려지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떨어진 단추를 옷감에 바느질할 때처럼, 그리는 행위는 비슷한 자리를 맴돌며 과거와 현재 사이에 촘촘한 선들의 그물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기의 결과물이 과거를 각각 어떻게 다르게 해석했는가보다는, ‘그리는 행위’가 계속해서 그리는 사람을 과거의 한 장면에 다녀오게 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리기를 통해 여러 시점에서 과거에 접속하기를 되풀이한다.
2층 양쪽 공간과 3층에 각각 걸려있는 괘종시계 그림 연작 〈머문 벽〉은 모두 같은 시간에 멈춰있다. 가장 앞선 시점을 지시하는 공간인 2층 왼편에 놓인 작품 속 시계는 완전한 종이 위에 그려졌다. 하지만 2층 오른편에 놓인 작품 속 시계는 그 위에 덮인 겹이 조각나 있다. 3층의 〈머문 벽〉의 경우, 처음부터 바탕이 되는 종이가 조각난 상태에서 그 위에 시계가 그려졌다. 이들은 작가가 계속해서 다녀오게 되는, 괘종시계가 지시하는 한 시점을 보여준다. 시계를 둘러싼 종이의 형태는 그 기억이 회상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됨을 보여주고, 한편으로 그 기억에 ‘시계’처럼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기억에서 어떤 것들을 변화시키거나 남겨두면서, 자석의 양극처럼 멀어질 수 없는 ‘순간’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이는 어떤 존재의 상실 이후에 남겨진, 하나의 이미지 혹은 텍스트에 압축된 수많은 질문을 매일 품에 챙겨 다니는 것과 같다. 그는 그 질문들을 품에 안고서, 그 질문을 수시로 꺼내보고 질문이 떠올랐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 사유를 끄적였던 것이다. 초점을 살짝 바꿔보기도 하고, 시각을 바꿔보기도 하면서. 질문의 답이 매번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그 질문들을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그물망을 만들어 왔다.
4. D.S, 세뇨부터 다시 연주하시오.
《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이라는 전시 제목이 연상시키는 장면처럼, 원소윤은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 뒤에 놓인 그림자들, 여러 방향으로 번진 그늘들을 보면서 걸어왔다. 1층에서 2층으로 계단을 올랐을 때,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말간 표지〉 속 ‘X’ 표시는, 과거에 인터폰의 버튼을 자꾸 누르던 할머니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붙였던 것일 테다. 하지만 이 버튼은 버튼을 누르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어떤 변화를 암시하는 기호로 읽히기도 한다. 이 버튼은 어떤 기억이나 사건이 떠오르기 이전과 이후라는, 두 차원을 나누는 경계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세뇨부터 다시 연주하시오.’라는 의미의 달 세뇨(D.S)가 악보의 한 시점으로 연주자를 단숨에 데려가듯, 이 버튼은 연주자가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세뇨일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으로부터 난반사 되는 그림들처럼, 세뇨로 돌아간 연주자는 아까와는 다른 숨결로 악보를 연주할 것이다. 여기 그 연주가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