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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Feb 09. 2020

망가지고 난 다음에

김소연, <i에게>

김소연, <i에게>, 아침달




1

망가지고 난 다음에 읽으면 좋은 시들이 있다. 이 시집의 몇몇 시들이 그랬다. 망가진 사람들과 망가진 관계들이 떠올랐고, 망가진 것들을 질근질근 곱씹으며 이 시집을 읽었다.


2

탁상시계를 던져본 적이 있다

손아귀에 적당했고 소중할 것도 없었던 것을


방바닥에 내던져

부서뜨려본 적이 있다


부서지는 것은 부서지면서 소리를 냈다

부서뜨리는 내 귀에 들려주겠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고백이 적힌 편지를

맹세가 적힌 종이를


두 손으로 맞잡고

천천히 찢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가벼운 것이잖아 하며

손목의 각도를 천천히 틀면서 종이를 찢은 적이 있다


찢어지는 것도 찢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찢고 있는 내 귀에 기어이 각인되겠다는 듯 날카롭게

높은 소리를 냈다


무너지는 것들도

무너지는 소리를 시끄럽게 낸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는 덧을 항변하는

함성처럼 웅장하게 큰 소리를 냈다


이 소리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소리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 나의 무고를 증명한다는 듯

기억을 한다 하지만


망가지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조용히 오래오래 망가져간다


다 망가지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는 것이다


기억에만 귀를 기울이며 지나간 소리들을 명심하느라

조용히 오래오래 내 귀는 멀어버렸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내가 키우는 식물이

자객처럼 칼을 뽑아 나를 겨누고 있다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매일매일 무화과처럼 나를 말린다


시원하게 두 동강이 나서

벌레가 바글대는 내부를 활짝 전개할 날을 손꼽는다


오늘 아침 나의 식물은

기어이 화분을 두 동강 냈다


징그럽고 억척스럽고 비대해진 뿌리들이

그 안에 갇혀 있다


- 김소연,「손아귀」전문  (<i에게>, p.15)


3

내 손에 적당하게 잡히는 탁상시계, 고백과 맹세가 적힌 종이를 던지거나 찢기보다도,  가지고 난 것을 뒤늦게 발견해버린 나에게 이 시는 '죄를 지나는 시'로 읽혔다. 탁상시계와 고백이 적힌 종이는 파괴되면서 복수하 거친 소리를 지만 망가지는 것렇지 않았다. 그것은 소리 없이 조용히 오래오래 망가지고, 망가지는 것도 지쳐서 그만하기로 했을  뒷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래서 시는 '망가지는 것이 냈을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한 죄'와 '망가지는 것은 소리 없이 망가진 다는 것을 몰랐던 죄'를 지나온다.

     것은 천천히 망가지면서 어떤 소리를 냈을까. 듣지 못한 작은 소리가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망가지는 것이 조용하게 냈던 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는 과거로 가곤 다. 귀 기울여 보아도 망가지는 것은 고통이나 복수나 분노를 말하는 목소리없기에, 기억할 소리조차 없어서 ''는 죄를 덜어낼 수도 없다. 어쩌다 밤에 깨어 마주친 식물은 죄를 알고 있다는 듯이 잎사귀 겨누고, 내가 키우고 나를 키우는 죄의식이라는 이름의 식물은 화분 속에서 자라난다. 징그럽게 비대해진 죄의식은 화분 안에 갇혀있다 못해 화분을 가르고 뛰쳐나온다. 제법 두터운 장벽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마음은, 화분은 순순히 조각났다. 조용히 천천히 소리 없이 망가진 것은, 망가진 자신을 발견한 ''게도 조용히 천천히 소리 없이 망가질 기회를 주었다.

     망가질 때는 모르고 있다가 다 망가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소중함, 후회, 죄책감, 그리고 어떻게든 고쳐보겠다는 무모함 같은 것 화분 안에 가득다. 미뤄온 시간만큼 몇 배로 불어난 감정들이 이자를 요구했고 너무 늦었으니 마음을 기증할 것을 독촉했다.


4

소리 없이 망가진 것을 많이도 보았다. 가까이 있는 사람도, 멀리 있는 사람도 말없이 버티다가 망가져서 불현듯 발견되었다. 어떤 날은 죄책감에 '차라리 소리라도 내면서 망가지지'라고 원망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도 같이 망가졌고, 역시 소리는 내지 못했다. 원래 망가지는 것은 소리 없이 망가지는구나, 라는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알아버렸다. 이 모든 게 상처 받고 싶지 않았던 비겁한 내가 초래한 일은 아니라고 믿어야지 다짐했지만 마음은 늘 반대의 것을 믿었다. 그것은 왜 소리를 낼 수 없었을까, 그렇게도 조용하게 망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보면 작은 깨달음에 도착한다. '너'와 '나'는 보기보다 뿌리가 크고 깊은 자기혐오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밖에 었다고.


5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 김소연,「i에게」부분  (<i에게>, p.34)


6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무엇인가 소리 없이 망가지고 있을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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