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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Jan 24. 2020

부르는 말은 듣는 말이 아니라 하는 말

윤해서, <암송>


윤해서, 암송, 아르테




1

멀리 있지만 함께인 듯한 목소리, 그래서 함께 있지만 멀리 있는 듯한 목소리.


로타어는 말했다. "사람의 목소리만큼 강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목소리가 그만큼 빨리 잊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음색과 특징이 우리 무의식 속에 가라아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p.25


2

소리의 파동은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소리의 파동은 결국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들이 뱉은 혼잣말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선주는 서커스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이후로 선주의 귀는 끝없이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선주에게 수신된 목소리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중에는 부르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한강을 따라 걷다가 선주는 들었다. 미소의 목소리.

당신에게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여자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

당신을 기억해.

찾아주고 싶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p.80


미소는 그의 애인 현웅과 홍콩에 갔다가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는 미소는 현웅을 그리워하고, 선주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인간이 한 모든 말의 파동은 남는대요. 사라지지 않고. 사물에 벽에, 공기 중에. 그래서 모든 공기 중에는 음성 파동이 진동하고 있다고요.(...) 누군가가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던 음성이 공기 중에 남아있다가 나에게 도착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p.129


식물인간이 된 미소는 사랑하는 현웅을 계속해서 부른다. 말할 수도 없고 눈을 뜨고 앞을 볼 수도 없고 현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미소는 '당신에게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한다. 현웅은 미소가 의식이 있는지, 자신을 찾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잠든 미소의 곁에서 책을 읽어주고 미소를 간호한다. 둘은 서로를 찾을 수 없고 만날 수 없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3

윤해서 작가의 소설에서는 시를 읽을 때처럼 때때로 사유가 튀어나오는데 소설을 주도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닌 이 짤막한 사유들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주인공이 이야기 안에서 중심축이 되어 사건을 만들고 해결해나가는데, 윤해서 작가의 소설은 사유들이 별이고 이야기는 그 별들을 잇는 선일뿐이다. 별자리처럼 별들 사이를 연결하는 상상 속의 점선을 그려 넣을 때 소설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의 이야기는 눈 앞에 있는 별으로 그어질지, 더 멀리 있는 별으로 그어질지 망설인다. 이야기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자기 자리를 쟁취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유는 하나하나 힘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사유들은 유리 조각처럼 화려함 없이 빛나고 화려함 없이 빛나는 이 문장들 아름답다.

 

하나의 문장은 하나의 세계이고 한 세계를 이루는 존재다. p.160


4

자고 일어났더니 겨울밤


늪 사람들 숲의 소리들

우와 아

우와 황새

우와 잉어가 사는 갑다


왜 사라지나 몰라

자꾸 잡아서 사라지지

자꾸 잡으니까 사라졌겠지


아니야 아니야

그게 많다가도 사라질라면 한 번에 사라져버려

한 번에 사라져


몰라 이유를 아나

그냥 사라진 거지


나는 아직 사나 했지

근데 아니야 이렇게 속이 없어

속이 텅텅 비었어 p.145


선주는 어떤 날 우포 논고둥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음정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자기 전에 자장가처럼 부른다. 우포는 늪이다. 늪에는 논고둥도 살고 황새도 잉어도 가물치도 많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 수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황새도 잉어도 사라지니 할머니의 마음은 텅텅 비겠다. 황새도 잉어도 없지만 할머니는 황새와 잉어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른다. 선주는 할머니의 그리움으로 부르는 목소리를 암송한다.


엄마.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바로 그런 말이에요. 부르는 말.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부르고 우는 소리. 부르면서 우는 소리. 불러 놓고 내내 울기만 하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지금처럼 그런 소리가 들리면 견딜 수가 없어요. p.126


부르는 말, 불러 놓고 내내 울기만 하는 소리는 혼잣말일 것이다. 누군가를 부르는 말인데도 혼자서 하니까 외로운 말이다. 혼잣말로 부르는 사람은 그 사람을 찾을 수 없고 만날 수 없어도 사랑한다. 혼잣말로 부르는 사람의 말은 사라지지 못해 노래가 되고 노래가 된 혼잣말은 암송될 것이다.


5

사랑은 믿는 게 아니라 하는 거라는 네 말,

알 거 같아. p.160


부르는 말은 내 말이 들릴 법한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말일 테다. 하지만 미소는 상대가 꼭 내 주위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는 나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도 현웅을 부른다. 말은 대상 없이 무엇을 부를 수 없고, 부를 수 있다면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혹여 당신이 나와 함께하지 않아서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할지라도 나는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르는 말은 듣는 말이 아니라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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