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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Dec 22. 2019

0인칭의 수수께끼

윤해서, <0인칭의 자리>

윤해서, 0인칭의 자리, 문학과지성사




1

해변가를 걸으면서 수많은 조약돌을 스치고, 줍고, 들여다보는 일처럼, 여기저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모양 지고 흩어진 이야기들을 마음에 주워 담는 시간이었다. 해변가를 걷는 일이 그렇듯, 여유롭지만 사변적 한 때를 만들어 주었다.


2

그런데 나는.

생각은. 몇 인칭으로 이루어지나. 생각은 1인칭, 2인칭, 3인칭을 넘어서. 생각은 수십 인칭, 수만 인칭이 되기도 하는데. 137인칭이 되었다가 8인칭이나 17인칭이 되기도 하는데. 인칭에 숫자를 매기기 시작한 건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나’는 언제부터 1인칭, 하나였을까. ‘나’에 대해 말하는 ‘나’는 어쩌다 하나뿐인 1인칭이 되었을까. ‘나’는 하나도 둘도 아니고, 때로 ‘나’는 하나와 둘에도 턱없이 모자라고, ‘나’는 0인칭이나 무한 인칭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다 ‘나’는 1인칭이 되어서 혼자인가. 어떤 ‘나’도 하나는 아닌데. p. 140


인칭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동작의 주체가 말하는 이, 말 듣는 이, 제삼자 중 누구인가를 구별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칭이라는 단어는 1인칭, 2인칭, 3인칭에 붙어있을 때는 상황을 서로 구분해줄 수 있지만, 8인칭이나 0인칭과 같은 숫자와 만났을 때는 어떤 설명도 해줄 수 없는 의심스러운 단어다. 차원이라는 단어가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까지는 설명할 수 있지만, 8차원이나 12차원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과 비슷하다.

     1인칭은 '나는~'으로, 2인칭은 '너는~'으로, 3인칭은 '그는~'으로 시작한다. 마치 내 앞에 나를 향해 일자로 줄을 선 사람들을 앞에서부터 한 명씩 부르는 것 같다. 1인칭은 내 자리, 2인칭은 내 앞사람의 자리, 3인칭은 내 앞의 앞사람의 자리, 137인칭은 내 앞의 136번째 사람의 자리. 그러면 0인칭의 자리는 어디일까. 소설의 '나'는 1인칭의 자리가 아닌 0인칭의 자리에 있고, 0은 무한과도 같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이기도 하면서 '그녀'이기도 하고, '나' 이기도 하면서 '그대'이기도 하다.

     인칭에 대한 의문은 작가가 낸 수수께끼이자, 연관성이랄 게 딱히 없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엮어주는 매듭다. 이 수수께끼에 따르면 내가 '나'를 말할 때 나는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잠시 머무르는 하나의 색일 뿐이다. '너'가 말하는 '나'도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우연하게 찾은 하나의 색일 것이고, 그래서 '나'와 '너'는 그 무엇도 지칭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무한의 자리이자 0인칭의 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가 낸 수수께끼의 답을 고민해본다.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고민 끝에 어디에도 없어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운 당신에 대한 고백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 역시 지금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당신이라는 사실의 폭로라고 답을 적는다.


3

당신, 그건 부르는 말.

아득하게 아득한 너를 부를 때

당신이라는 말.

어디에도 없는 너를 당신, 하고 부를 때

내가 부르는 것은 너인지, 나인지, 그인지

당신은 2인칭이 아니라는 것을 아흔아홉 해를 살고 알았다.

그건 거짓말. 나에게는 부를 당신이 없고 나는 아흔아홉 해를 살지 않았으니.

계속 속고 싶어 속으로 부르는 말.

너도 나도 불러내지 못하는 말.

이미 오래전 20만 년 전 너의 첫 출현과 동시에 사라진 말.

그러므로 당신, 당신은 무인칭,

당신이 없는 모든 곳에 당신이 있어. p.150


문뜩 내가 그동안 소설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은 생각해본다. 얼마나 많았는지, 얼마나 다양했는지, 얼마나 달랐는지. 그리고 오늘의 나와 수많은 어제의 나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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