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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Dec 26. 2019

모두가 한 쌍의 눈만을 가진 세계

박솔뫼, <인터내셔널의 밤>

박솔뫼, 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1

그래도 숨을 수는 없었다. 저는 정미나입니다 사실 최유리이지만. 저는 김소현입니다 사실 유민지이지만. 그렇게 말해도 숨을 수는 없었다. 이름을 감추고 여러 가지를 속여도 주민등록은 지나치게 촘촘했다. 모두 때가 되면 관공서로 가 지문을 등록하고 피할 수 없는 국민의 망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식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요? 누구는 사기를 치고 해외로 도피하고 여권을 위조하고 얼굴을 바꾸고 그렇게 살아가기도 한다고. 그렇지만 그렇다는 것은 밝혀져버렸다는 것이잖아요?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물론 매일 밤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는 생각이었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p.37


한국의 주민등록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한솔과 사이비 교단에서 벗어나 이모네로 도망을 치는 나미는 우연히 부산행 기차에서 만나게 된다. 나미는 한솔이 읽 책을 궁금해하고, 한솔은 읽을만한 책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는 나미에게 그 탐정소설을 선물한다. 한솔은 숙소로 돌아와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한솔은 프라하에 가기 위해 입국 수속을 밟다가, 자신이 보편 시민이 아님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창구의 공무원은 배제라는 말을 아느냐고 묻는다. 배제라는 말을 알아야만 창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배제라는 말을 아느냐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함께 한솔의 머릿속을 매일같이 맴돈다. 집단에서 벗어났을 때 혹은 집단의 규칙에서 벗어났을 때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배제된 자가 된다는 것, 배제는 집단을 벗어나기 전에도 벗어난 후에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 표식을 위한 것이다.

   한솔은 어린 시절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가는 길에 부산에 머물렀다. 그 친구는 한솔이 가슴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때 함께해주었던 친구다. 한솔은 가슴을 제거고, 언젠가는 자궁도 제거하게 될 것이다. 한솔은 숫자 '2' 혹은 '1'으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는 주민등록증에서,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여성도 남성도 아닌 배제된 자로 규정하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2

당신은 배제라는 말을 압니까? 꿈에서 창구의 공무원은 물었다. 배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체득한 자를 통과시켜주었다. 그것이 꿈의 논리였다. 배제를 알지 못하면 배제를 배워야 할 것이다. 밖에서? 세상에서? p.73


나미는 지금은 벗어난 사이비 교단이 언제 다시 자신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어디를 가든 사이비 교단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솔은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통해 배제된 자로 규정되어 있다. 가부장적이고 성별 이분법적 시선을 가진 사회 안에서 한솔은 여성이어야만 한다. 둘 다 크고 작은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들이지만 내재된 감시의 눈은 그 안에서 벗어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 옭아매는 것은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들을 지배한다. 그래서 새장 밖은 더 큰 새장이다. 새를 가두고 있던 물리적 새장을 벗어난 뒤에는 마음을 가둔 새장이 모든 곳에서 그들과 함께 할 테니까. 배제를 안다는 것은 '당신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지금 나의 부족한 어떤 부분들이 보완된 누군가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미의 사이비 교단처럼 오랫동안 나와 함께했던 무엇, 사이비는 맞는데 사이비라고 하기도 뭐한 무엇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을까. 나미가 함께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 교단의 사람들처럼 아른거리는 누군가가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을까. 사이비 교단은 아니지만 내 안에서 나를 감시하고 나를 두렵게 하고 나에게 명령하는 시선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벗어나고자 하는 그것을 완전히 삭제하고 거기에서 탈출한 나가 될 수 있을까. 지우고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여러 가지 것들이 사라지면 바람직은 하겠지만,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기도 한데 그것들이 내 삶에서 깨끗하게 다 지워져 버리면 그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어떤 속성을 게임 캐릭터처럼 부분적으로 빠르게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은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닌 현실과 자연에 속한 존재이니까. 자연의 특성은 서서히 유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변한다고 해도 흔적을 남기고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변한다. 그래서 자연계에는 어느 한 부분만 순식간에 '뚝딱'하고 변하는 것은 없다. 변하는 모든 것은 느리게, 함께 변화한다. 그리고 고통을 동반한다.


3

그는 탐정소설 속 많은 탐정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전화번호부로 사람을 찾고 직접 문을 두드리고 동네 바로 가서 위스키를 마시며 출입문을 감시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찾거나 못 찾는 것이 좋았다. 그런 방식에는 납득할 수 있었다. p.44


탐정소설에서 탐정은 발자국과 흔적을 따라 서서히 범인을 찾지만, 지금은 cctv와 신원 조회를 통해 범인을 찾는다. 범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둘러싼 울타리를 좁혀가는 것이다. 넓게 퍼져있던 망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 거기에는 범인을 쫓으면서 두근거려 하거나 숨이차게 뛰는 순간이 없다. 고통도 신체성도 없다. 한솔과 나미가 벗어나고 싶었던 곳 역시 사실은 한국이나 사이비 교단이 아니다. 그들이 벗어나고 싶었던 곳은 감시의 파놉티콘이자, 기계의 눈이 달린 신체성이 없는 세계다.

     한솔이 나미에게 선물한 탐정소설 속의 세계는 천천히 변하는, 신체성과 고통이 있는, 흔적을 남기는, 그리고 감시를 하든 감시를 받든 모두가 한 쌍의 눈만을 가진 세계다. 그 세계는 비행기가 아닌 기차와 배의 보폭에 맞춰 걷는 한솔과 나미와 같은 사람들에게만 빼꼼히 문을 열어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빨라지는 것에 맞춰 사람들은 계속 옮겨질 것이다. 그게 주요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을 잃은 사람인 채로 길 위를 지나가고 기차가 멈춘 곳에 도착할 것이다. (...) 그런 식으로 뭔가를 잃은 사람으로 길 위에 자신의 중요한 것들을 흘려버린 존재로 살게 될 것이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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