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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Jun 09. 2020

망설이고 있어서 미안합니다

박노완 작가 작업에 대한 글


만화 '치즈 스위트 홈'에 나오는 고양이 '치'의 정식 캐릭터 상품을 찾기 위해 해외 주문 사이트나 오픈 마켓을 샅샅이 뒤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의 인형 뽑기 기계나 저렴한 핸드폰 잡화 숍에 치와 닮았지만 미묘하게 다르게 생긴 고양이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도색의 깔끔함이나 형태의 마감, 그리고 이목구비나 색상에서 원본을 살짝 빗나가 있었다. 짝퉁 치가 남긴 잔상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정품이 아닌 짝퉁 캐릭터는 '팔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상품의 목적성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했고, 동시에 웃고 있는 캐릭터의 표정을 부자연스럽게 느끼게 했다. 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짭카츄와 짭키마우스¹, 여러 번 덧그린 흔적, 속없이 웃는 캐릭터, 중심을 잃은 대상, 그리고 물 빠진 색채들이 박노완의 화면을 채우고 있다. 위조에 실패한 피카츄와 중심을 잃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친 에어간판은 극단적인 광고성 이면의 공동(空洞)을 비추는 듯하다. 여러 번 덧그리는 방식으로 표현된 대상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틀리면 안 되는데'를 반복하며 그려진 선에 또다시 선을 더한다. 눈부시게 희지도 않고 그렇다고 힘 있게 어둡지도 않은 물 빠진 색채는 채도와 명도의 스펙트럼 안에 머무르면서 자신도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모른다. 광대한 팔레트 위 어딘가에 좌표를 가진 색상 값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다. 그런데 웃는 캐릭터 속의 공허함도, '틀리면 안 되는데'라는 불안감도,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망설임도 첫인상이 낯설지 않다. 익숙함을 넘어서 반갑기까지 하다.


피카추와친구들, 2016, watercolor on canvas, 162.2 x 260.6 cm


1 상품을 바라보는 상품

<피카추와 친구들> 속의 피카츄와 미키마우스, <토마스...> 속 넘어진 토마스 기차는 웃고 있는데 비현실적으로 뒤틀어진 주변 배경은 웃음보다는 걱정을 자아낸다. <행운적중>, <최고!최고...>는 자신이 광고하는 것들의 가치를 한 것 뽐내고 <welcome>, <food tube>는 홍보성 멘트가 적힌 슬로건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잠깐만 보아도 느낄 수 있다. 이 광고성 물체들의 섬뜩함을 말이다. 마네킹 인형의 팔과 손목을 연결하는 부위에는 유격이 생겨 마치 잘리다 만 손목이 덜렁거리고 있는 것 같고, 고꾸라진 채로 행운적중을 외치는 에어간판은 '당신의 행운은 딱 여기까지다'라며 눈앞의 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뿐일까, <휴게소의 강아지 인형들>의 강아지 인형은 자기를 뽑아주기를 기다리는지 일렬로 줄을 서있다.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이 자본주의가 낳은 상품성이라면, 공통적으로 주는 감각은 기이함이다.

     '자낳괴'² 라는 말이 있다. '자낳괴'는 '자본이 낳은 괴물'의 줄임말로, 자본주의에 순응하여 적극적으로 자본을 쓸어 담는 인상의 속물을 의미한다. 그림 속에 보이는 것들도 기이한 감각을 준다는 면에서 괴물이라는 단어를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자낳괴'와는 좀 다르다. 원본과 미묘하게 어긋난 이목구비의 캐릭터와 잘리다가 만 듯한 손목은 자본주의에 순응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지친 표정을 짓고 있다. 상품성으로 가득한 이 대상들은 괴물로 태어났다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괴물이 된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는 괴물이 되는 것 밖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이함을 넘어서 섬뜩함까지 느끼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이 상품들이 그저 홀로 상품으로 있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food tube>의 '지방의 마블링을 한 번 보세요'라는 문장과 마네킹의 잘리다 만 손목은 그림을 보는 감상자 자신의 신체를 연상시킨다. 휴게소에서 선택받기를 기다리며 줄을 선 강아지 인형은 과열된 경쟁 속에서 선택을 기다리는 취업 준비생을, 그 뒤쪽에 이들의 대표로서 좁은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작동하고 있는 강아지 인형은 벽에 부딪혀도 직진만 해야 하는 직장인을 떠오르게 한다. 결국 이 섬뜩함의 실체는 타자화된 것을 바라보다 그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 온다. 즉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상품을 바라보는 상품'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광고성을 가지고는 있으나 광고효과를 나타내기에는 기능을 다한 듯 보인다. 곧 새로운 마네킹과 새로운 캐릭터, 더 신선한 고기와 빳빳한 에어간판으로 교체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자신과 닮은 대상들이 인스턴트식품처럼 기능을 다하면 신속히 대체 가능한 무엇으로 비친다는 점 역시 우리를 소스라치게 한다.


휴게소의 강아지 인형들, 2017, watercolor on canvas, 13x14 cm


2 '망했다'라는 낙인과 성실함

<국거리>와 <맥 빠진 것들>, <깨진 라바콘>의 형태들은 기존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어딘가 하자가 있다. 이것들은 비실비실하고 풀이 죽었거나 파손되어 있다. 본래의 쓸모가 있었던 대상들이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하기에는 기능을 잃은 듯 보인다. 라바콘이 라바콘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니 이 라바콘은 '망했다'. 파괴된 체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라바콘과 주차금지 표지판, 한데 모여있는 비실한 국거리는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위치에서 감상자에게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망했다는 낙인은 더욱 선명해진다. 칙칙한 회색 톤의 물 빠진 색채는 상황을 한층 더 우울하게 필터링한다.

     여기서 맥 빠진 모습으로 기울었지만 주차금지의 역할만은 포기하지 않은 표지판은 곤두박질한 에어간판, 줄 서있거나 직진하는 강아지 인형과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은 최상의 효과를 선보일 기능성은 잃었지만 성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망했다는 낙인 속에서 절망을 대체할 차악은 성실함뿐이다. 20-30대의 밈(meme)³인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처럼 성실함으로 무장하고 버티면 1등은 못해도 포기할 일은 없지 않은가.


3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희박한 채도 속에서 줄을 서서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인형과 '우리 동네 최고!'를 외치는 웃는 얼굴은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자신들이 그다지 선택받을만하지 않다는 것과 '최고!' 역시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최고가 될 수 없는 세상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기심으로 타인을 짓밟고 올라가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문제로 귀결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이다.

     한 번에 그린 붓질이 선이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양성의(positive) 형태 짓기라면, 여러 번 덧그리고 흐트러뜨리고 직선을 덮고 가리는 과정을 통해 선과 형태를 만드는 것은 음성의(negative) 형태 짓기라고 할 수 있다. 양성의 형태 짓기가 확신을 품고 맞는다고 믿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음성의 형태 짓기는 아닌 것을 걸러낸 후에 남는 것만 보여주는 반증을 통한 그리기 방식이다. 맞는 게 없어서 맞는 것은 보여줄 수 없고, 남겨진 아닌 것들만 보여주는 상황은 확신보다는 의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맥 빠진 이미지와 반어적 자기 비하가 담긴 텍스트, 음성의 형태 짓기를 통한 그리기 방식은 이기심이라는 선택지를 버리고 자기 의심을 선택한 자의 마음이 머문 결과물에 가까워 보인다. 아니면 주어진 선택지에서 아무것도 고르고 싶지 않아 망설이는 사람의 붓질일지도 모르겠다.


4 혹시 제게도 망설일 자격이 있나요

이 그림들이 태어난 시기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순응할 수도 없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 괴물이 되었다는 감각, 상품으로 키워진 것도 모자라 심지어 팔리지조차 않는 낡고 오래된 공산품의 허무함. 밀레니얼 세대로 대표되는 현재의 20-30대 연령이 가진 좌절과 우울의 감각은 그들을 선두로 하여 방사형으로 흩어져 있다.

     "희망을 가지자"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귀에 박혀있는 걸 보면 인간은 대체로 언제나 희망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희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심리는 이 세대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속 성장의 시대를 지나,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노동의 값이 떨어지고 그 안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더 높은 스펙으로 경쟁해야만 하는 저성장 시대의 사람들이 마주한 세상을 바라보자. 그들의 미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능력을 쌓고, 능력을 쌓은 결과로 더 치열하게 경쟁하라"라는 명령이 지배한다. 경쟁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이곳의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붓을 들고 망설이는 사람처럼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사실은 아무것도 고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주입된 강박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포기와 허무는 자신의 나약함과 준비되지 못한 미래를 예언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을 대표하는 슬로건은 "하면 된다"가 아닌 "안되어도 하는 수밖에 없다"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택과 노력을 망설일 자격이 있는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망설임 자격증'을 보유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버티기를 택한다.


경쟁이라는 외길은 걸어가면 갈수록 길의 폭이 좁아지도록 만들어졌다. 이 위에서 걷는 사람은 점점 괴상한 균형감으로 외줄 타기를 하게 된다. 폭이 좁아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 길의 끝에서 하나의 점으로 그 존재의 무게가 소멸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실존의 무게가 소멸되기 직전에 놓여있다면 다른 방향키를 사용해볼 수 있겠다. 그 자리에서 거꾸로 돌아 '저곳으로 가는 게 좋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거나⁴, 혹은 옆으로 돌아 길이 아니라고 믿었던 곳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다.



무제, 2019, watercolor on canvas, 260.6 x 193.9 cm












1) 짭카츄는 피카츄의 모조 캐릭터를, 짭키마우스는 미키마우스의 모조 캐릭터를 칭한다.

2) 자낳괴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의 줄임말로,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이나 신념도 돈 앞에서는 바꿀 수 있는 태세 전환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3) 인터넷 밈(internet meme)이란, 대개 모방의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사람에서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따위를 말한다. 이에 대응되는 한국어 표현으로는 필수 요소, 혹은 짤방, 짤이 있다.

4) 표기한 문장은 [윤이형, 『피의 일요일』, 전승희 옮김, Asia Publishers, 2014] 소설 내용의 영향을 받았다.

5) 맬컴 해리스, 『밀레니얼 선언』, 노정태 옮김, 생각정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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