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간선도로의 차들은 족히 수 킬로미터는 이어져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앞에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차들 사이의 좁은 간격에 흘러넘쳤다.
라디오에서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의 '사계'에 이어 골리요프의 '라스트 라운드'와 요제프 수크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가 흘러나왔다. 이 아름답고 장중한 음악은 잠시 나의 '굳센 의지'를 희석시켰고, 앞차와의 간격은 순간 벌어지고 말았다.
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오른쪽 합류도로에서 나타난 흰색 BMW 520D가 엄청난 속도로 거칠고 오만하게 그 간격을 아슬아슬하게 훔쳤다. 그 차는 자신의 움직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당연히 깜빡이도 켜지 않았고 진행방향을 드러내는 어떤 작은 움찔거림도 없었다. 꽤나 익숙한 솜씨였으며 자신의 기술을 마음껏 과시했다.
내 의지를 짓밟은 그를 향해 잠시 분노가 솟았지만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는 곧 그 분노를 지워버렸다. 음악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창 밖의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었다.
음악이 아름다운 흰 눈으로 화하여 내 눈앞을 떠도는 것 같았다.
뒤에서 들리는 짜증 섞인 경적소리가 음악의 몰입을 깼다. 그 순간 아름다운 흰 눈은 방사능 낙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앞을 훔친 앞 차에서 회색 담배연기와 함께 담뱃재의 낙진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지나칠 때 힐긋 본 흰색 BMW 520D의 운전자는 많아야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차유리창을 내리고 연신 밖에다 연기와 낙진과 붉은 불꽃을 뿌렸다. 그의 손은 길고 가늘었으며 그의 차 색깔처럼 하얗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담배꽁초를 도로에 버렸다. 꽁초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마지막 붉은빛을 잠시 내뿜고 이내 사그라졌다.
순간 저 꽁초 대신 차창밖으로 나온 그의 흰 손목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해 보았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옆 차에 치어 끊어져 버린 손목, 떨어져 나간 절단면의 동맥에서 선홍색 피가 샤워기의 물처럼 솟구쳐 그의 순백색 BMW 520D의 차체를 붉은 장미꽃 무늬로 물들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그가 노래하는 카스트라토처럼 높은 고음의 외마디 비명이 섞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