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 / 지그문트 바우만.
이 책은 다 읽는데 오래 걸렸다. 내용은 어렵지 않지만 바우만 특유의 많은 비유와 만연체는 읽기가 편하지 않다. 바우만 책의 번역자들은 꽤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사회주의 경제 구조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런 내용은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바우만은 여러 사상가들이, 사회주의를 그 본질적인 신념이나 태도가 아닌 체제의 구조(특히 경제 시스템)를 통해 사회주의를 정의한다는 것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는 경제운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소유권의 형태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대중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또한 책 제목에 있는 ‘유토피아’를 보면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짐작할 수 있다.
“유토피아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습관적인 연상을 깨는 능력, 얼핏 압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평범하고 틀에 박힌 ‘정상 normal’의 지배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세상(유토피아)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꿨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왕과 귀족이 지배하고, 여성은 투표를 할 권리가 없으며 어린아이들은 하루 16시간 동안 노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본질과 신념, 태도에 관해 쓰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소비에트의 전체주의나 북한의 봉건체제와 동일시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빨갱이'란, 자신의 무지를 숨겨주고 전능한 힘을 주는 단어다.
바우만은 도이처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일어난 혁명(러시아 혁명을 말한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주의의 패러디로 보이는 잡종을 낳았다... 러시아 혁명은 서양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억제제로 작용했다.”
바우만은 스스로 소비에트의 전체주의, 장검을 든 이국적인 사회주의, 도를 넘어서는 공격적인 편협함을 자랑하는 미숙한 급진주의를 목격한 세대라고 말하며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한다.
“소비에트 체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면서 부르주아적 잣대로 자신의 완성도와 진전도를 평가했다.”
결국 소비에트 체제가 서양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우만은 부르주아 헤게모니에 갇혀있는 개량적 사회주의자들도 비판한다. 그들은 기존의 체제를(경제 시스템에 한하여) 조금씩 개선하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 구조에만 국한된 현실적인 타협이란 결국 기존의 지배시스템에 부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6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현재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