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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Jul 11. 2020

알베르 카뮈, <이방인>

거짓말하지 않는 인간

“근데, 왜 그렇게 멍해 보여? 다시 한번 묻는 거지만.” 
“아마도 아직은 이 세상이 낯설어서 그럴 거야.” 
“짐 모리슨 노래에 아마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 
“People are strange when you’re stranger(네가 낯선 이일 때 사람들이 낯설어져).”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3.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종종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아는 척하려고. 면피하려고. 떳떳지 못한 일을 정당화하려고. 사실을 말하면 손해 볼 것이고 융통성도 없다고 말할 테니까. 그런 내가 티끌 하나 없는 진실을 추구하고 싶어졌다. 나는 이율배반으로 가득 찬 사람인가? 고민하던 어느 날, 거짓말하지 않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 물었다. 왜 당신은 거짓말하지 않죠? 


그의 대답. 내가 거짓말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네?


© 민음사/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



소설 <이방인> (L'Étranger)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지음. 1942년 발표.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알제리(당시 프랑스 식민지) 알제. 선박회사에서 일하는 뫼르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식에 다녀온다. 돌아온 뒤 옛 직장 동료 마리와 함께 해변에서 놀고 영화를 본다. 그러다 친구 레몽이 일으킨 사건에 휘말리고, 태양에 긴장한 나머지 총을 쏴 사람을 죽인다. 형무소에 갇힌 뫼르소에게 변호사와 예심판사가 찾아와 죄를 뉘우쳤다고 말하라 조언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재판에 출석한 뫼르소는 재판장이 살해 동기를 묻자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답한다. 상황은 뫼르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한다. 그 뒤 감방에 찾아온 형무소 부속 사제가 하느님을 거론하며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자 그에게 분노를 터트린다. 스스로에, 그리고 죽음에 확신을 가진 뫼르소는 행복해하며 사형을 기다린다.




Étranger [etʀɑ̃ʒe]. 형용사. 외부의, 낯선, 관심이 없는. (동아출판)


뫼르소는 Étranger였다. 그는 1부에서 생각 없는 청년으로 묘사된다. 사는 이유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계획 없이 행동한다. 생각은 순간 지나가는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나는 그 결과를 보고 당황한다. 대개 슬픔이 지배하는 장례식에서 보이는 태연함. 아무렇지 않게 놀러 가는 냉정함.


그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낯선 사람'이다. 세상과 섞이지 않고 그 바깥으로 자신을 데리고 갔다. 환한 빛으로 가득한 알제 거리는 그저 눈에 비치는 대상이다. 자기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레몽이 던진 제안에 반대할 이유가 없고, 파리로 가 삶을 바꿀 이유도 없다. 결국 그 점들이 우연으로 모여 뫼르소를 태양으로, 살인으로 이끈다. 


문장은 감정이 들어가지 않아 차갑고 건조하다. 무엇보다도, 짧다. 첫 말이 보여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작품을 열고 첫 죽음을 알리며, 뫼르소가 내뿜는 차가움을 응축한다. 사람을 죽이고서도 뫼르소는 세상 무관심하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관심을 보인다.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뫼르소는 국선변호인을 배정받아 만난다. 그는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을 묻는 변호인에게 느낀 그대로 대답한다. 그는 화내며 재판에 불리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변호인은 거짓말을 요구한다. '나는 죄를 뉘우치고 있다.' 면피하기 위해 하는 변명이다. 변호사에 이어 예심판사가 뫼르소를 회유하려 시도한다. 뫼르소는 둘 다 거절한다. 그는 계속 자기가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자 하고, 거짓말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행동은 사실은 카뮈 스스로가 세운 정교한 계획에 따른 것이다.


카뮈에게는 거대한 작품 세계가 있었다.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 세 주제를 문학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방인>은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시지프 신화>와 같이 부정으로 분류된다. (긍정에는 <페스트>, 사랑에는 미완성된 <최초의 인간>이 들어간다.) 셋을 관통하는 그의 주장은 요컨대, 인간은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그에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에서 이 주장은 거짓을 요구하는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오직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구체화된다. 


변호인과 예심판사를 만난 이후 뫼르소는 Étranger스러운 태도를 버린다.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뫼르소는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사회는 그에게 관심을 접으라고 했다(카뮈는 이걸 ‘유희’, ‘연극’이라 표현한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세상은 뫼르소를 공격한다. 예심판사 앞에서 “어머니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타이피스트는 움찔했다.


법정에 나온 뫼르소. 세상은 그를 '낯선' 사람으로 만들며 다시 회유한다. 운명을 쥔 쪽은 재판부, 검사, 변호사, 배심원 같은, 뫼르소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다. 의미 없던 행동들이 해석되고 의미를 받는다. 검사는 장광설을 우스꽝스럽게 토하지만 그 말에는 뫼르소를 누르는 힘이 있다. 장례식에서 뫼르소를 본 노인들이 하는 증언은 이목을 끌고 검사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뫼르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설득력도 없다. 그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냉혹한 살인자가 되었다.


공판이 끝나기 직전 판사는 뫼르소에게 변론할 기회를 준다. 봐, 이래도 항복하지 않을 거야? 뫼르소의 대답.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그에게 죽음이 내려진다.




죽음에 직면하자 뫼르소는 자신이 진실에 관심을 두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카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찬 곳이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 이유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죽기 직전까지 열과 성을 다해 부조리를 무너뜨리면서 살아야만 한다. 뫼르소가 해야 할 일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발현되었지만(현실에서 재현되기도 바라지 않지만), 그는 충실하게 수행했다.


뫼르소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희미하게 깨달았을 무렵 사제가 그를 찾아왔다. 다시 뫼르소는 Étranger로 돌아간다. 그는 이미 진실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끌리지 않는다. 하느님은 오히려 권위에 고개를 숙이고 '놀이' 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거짓말이다. 세상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뫼르소를 회유한다. 뫼르소는 이전 두 번과는 달리,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도 어느 정도 깨닫고 있다.  


'어느 정도'는 곧 '확실히'로 바뀐다. 사제는 회유가 실패하자 뫼르소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 뫼르소는 기도를 참을 수 없다. 기도는 그가 수호하는 진실을 위협한다. 만약 뫼르소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사제로 대표되는 세상은 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믿을 것이다. 뫼르소는 마침내 분노를 터뜨린다. 안개가 걷힌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뫼르소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방인>에는 대립 관계가 꾸준히 등장한다. 삶과 죽음, 바다와 태양, 감방의 빛과 어둠, 세상이라는 연극 안과 바깥, 우연들이 모인 진실과 필연을 원하는 거짓. 둘은 공존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차이가 있어 모순이 발생한다. 결과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 즉 부조리로 가득 찬다. 1부와 2부도 대립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둘의 어조와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골고루 남아 있다.


어머니는 사실 뫼르소가 간 길을 앞서서 갔다. 그는 삶을 다하기 직전 약혼자를 만들었다. 죽음 앞에서 더욱 치열하게 살았고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서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뫼르소도 “세상의 무관심에 마음을 연”다. 그는 마침내 행복을 얻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삶과 자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뫼르소가 내뿜는 온도는 급격하게 변해, 차갑고 메마른 문장이 그가 좋아했던 뜨겁고 더운 태양을 닮아 간다. 


그는 거짓말을 거부했고,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세상이 끝내 멋대로 해석하고 죽음을 내려도 피하지 않으며 당당한 로 죽을 것이다. 소원대로, 사형장 앞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야유한다면 그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더 많고, 더 거센 공격과 비난이 몰아칠수록 그가 붙든 진실은 더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알고 있다.




나는 <이방인>을 읽으며 눈이 뜨이는 경험을 했지만, 거짓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며 거짓말을 합리화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련다. 그가 단두대에 올라가는 날, 원했던 대로 거센 증오를 보내주겠다. 군중 사이에서 소리 높여 야유하고 비난하리라. 그것이 거짓말쟁이인 내가, 그가 발산하는 뜨거운 햇빛에 눈을 뜰 수 없는 내가 순교자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찬사니까."


나는 이제 거짓말쟁이로 살고 싶지 않다. 사제의 기도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결국 그가 수호하는 헛된 권위와 불합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뫼르소처럼 고함치며, 길길이 뛰며 저항하겠다. 부정과 부조리가 줄어든 세상을 위해 진실을 붙들고 싸우겠다. 그것이 내가, 그가 발산하는 뜨거운 햇빛에 눈을 뜰 수 없는 내가 순교자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감사니까.


덧붙이며: 

이 글은 2017년 11월 3일에 완성한 글을 고친 것이다. 민음사 세게문학전집판 <이방인>에 딸린 부록 중 (카뮈가 직접 쓴) 미국판 서문에 실린 해석을 따랐다. 책을 읽던 당시 내 마음과 적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해석에 내 생각을 아주 조금 덧붙였다. 이미 다른 사람이 생각해 발표한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노파심으로, <이방인>은 사실주의 소설이 아니다. 뫼르소의 행동은 장치일 뿐이며, 절대로 현실에서 권장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성찰해야만 '진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인 뫼르소가 이름이 남지 않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배경 알제리가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점을 생각하니 지나칠 수 없었다(카뮈는 식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고향 알제리를 사랑했으며 '알제리 문제' 해결을 위해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이를 떠나 프랑스는 알제리를 백 년 넘게 식민 통치했다. 둘 사이 권력관계는 프랑스로 크게 기울어 있었다.). 마침 아랍인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해석하고, 그에게 이름을 준 작품이 있다. 카멜 다우드가 쓴 <뫼르소, 살인 사건>이다. 시간 날 때 읽어보고 싶다.


영국 록 밴드 더 큐어(The Cure)의 노래 "Killing an Arab". 가사는 <이방인>에서 영감을 얻었다.


[배경화면] ©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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