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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Jun 21. 2020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불현듯 떠오른 짜릿함, 이피퍼니

2018년 1월, 전역을 다섯 달 앞뒀다. 기쁠 법도 했지만 다소 무기력했다. 2년 가까이 공들여온 삶에 회의가 들었다.


글쓰기는 색깔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군에서 자유롭게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와 겹쳐 독후감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름 열심히 연습하고 있던 중, 사회에 머무르던 다른 사람들이 창작에 몰두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걸 보고 나서 조급함이 들었다. '글쓰기보다 삶에 더 도움이 될 다른 공부들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미치면서 모든 열망이 사그라졌다. 그런데 새로 시작할 다른 무언가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간은 억지로 글쓰기에 매달렸다. 잘 될 리 없었다.


힘이 고갈되었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밝아지고 욕심이 생겼다. 소명에 응답한 사람 이야기를 읽고서였다.


문학동네 공식 트위터에서 인용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지음. 1916년 발표.

진선주 옮김. 문학동네, 2017.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1916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총 5장으로 되어 있다. 원래 1904년 <스티븐 히어로>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1907년에 이름을 바꾸고 개작해 9년 노력 끝에 발표했다. 가톨릭과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접하며 자란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가 점차 둘에 회의를 품고, 여러 계기를 통해 예술가라는 소명을 찾은 뒤 그로 거듭나기 위해 망명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후 디덜러스는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의식의 흐름, 생략, 다양한 서사 포맷을 실험하며 스스로의 예술관을 디덜러스의 입을 통해 펼쳐 보인다. (5장에서 읽을 수 있다. 해설은 "예술가의 역할은 작품에서 물러서서 침묵하며 수용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와 종교 상징이 짙게 투영되어 조이스를 탐구하는 학자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가 떨친 악명에 비해 읽기 쉬워서 <더블린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Culture Club/Getty Images


이피퍼니(Epiphany). ‘현현’으로 번역된다. 신,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가 나타났음을 뜻한다. 보통 이 단어는 두 상황에서 쓰인다. 크리스트교에서 사용할 때와 조이스 작품을 이야기할 때다. 조이스는 이 단어를 자기가 활용한 서술 기법에 이름으로 붙였다.  조이스의 소설에서는 ‘사소한, 또는 잠깐 지나간 이미지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 일’이 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이피퍼니가 두드러지는 부분은 4장이다. 세 번 나온다. 스티븐이 성직자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이름 스티븐 디덜러스가 무슨 뜻인지 깨닫고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곧바로 바닷가에서 한 소녀를 보고 황홀함에 젖어 삶을 받아들인 순간. 나를 환희에 차 뛰게 했던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였다. 두 순간을 설명하고 싶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답답한 마음에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 있던 스티븐. 근처에서 물놀이하던 친구들이 그를 부른다. 작은 외침에서 스티븐은 불현듯 이름,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가 어떤 뜻인지 터득한다. 성령이 충만하였고 믿음을 굽히지 않아 끝내 목숨을 잃은 순교자 스테파노(스데반). “그리하여 그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기술에 온 힘을 쏟았다”는 꾀 많은 장인 다이달로스(Daedalus).


스티븐은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이 자기 앞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명장이 되고, 순교자가 되어 아름다움에 반하는 모든 가치를 떨쳐내는 삶. 마치 예수가 사도 바울에게 말하듯 “세상 저편에서 그를 부르던 목소리”가 스티븐을 깨웠다. 스티븐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스스로를 해방했다.


“그런데 이제 그 전설적인 명장의 이름을 듣자 그는 파도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고 날개 달린 어떤 형상이 파도 위를 날아다니다가 서서히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언과 상징으로 가득 찬 중세 서적의 한 페이지를 시작하는 이상야릇한 도안이었을까, 태양을 향해 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매처럼 생긴 사람, 아니면 그가 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투신하기로 되어 있어 안갯속을 헤매는 듯한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변함없이 추구해왔던 그 목표의 예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작업실에서 흙이라는 보잘것없는 재료로 새롭고 우뚝하면서도 감지해낼 수 없는 불후의 대작을 새롭게 빚어내는 예술가의 상징이었을까?”


조이스에게는 그만 쓸 수 있는 문체가 있다. 길고 두텁다. 장황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어와 언어가 손끝에서 머리로 전해지고, 나는 그가 구사한 언어를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다. 그가 천재라고 느껴진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진다. 메마른 땅에서 느닷없이 빛이 내리고 불길이 타오른다.


1장 스티븐이 돌런 신부에게 매를 맞는 장면, 2장 스티븐이 성욕을 견딜 수 없어 거리에서 방황하다 ‘대죄’를 저지르는(즉 성매매를 하는) 묘사를 읽을 때. 나는 이런 작가가 존재했음과 그의 언어를 수려하게 다듬은 번역가가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조금 더 읽어 본다.


“그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으로 목이 아렸다. 매나 독수리가 창공에서 크게 울 듯 바람을 향해 자신이 해방되었음을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고 싶었다. 이것은 그의 삶이 그의 영혼을 부르는 외침이었지, 의무와 절망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둔탁하고 천박한 목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 그의 영혼은 수의를 벗어던지고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부활했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자기와 이름이 같은 그 명장처럼, 영혼의 자유와 권능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동하는 작품, 즉 새롭고 우뚝하면서도 아름답고 감지해낼 수 없는 불멸의 가치를 지닌 작품을 당당히 창조하리라.”


이름이 가진 뜻을 알게 된 뒤 흥분과 환희에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스티븐은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눈에 한 소녀가 들어온다. 아찔하여 움직임을 멈춘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다. 경이로움에 싸여 말을 잊은 스티븐은 가만히 “숭배의 시선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그도 시선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소녀가 발로 바닷물을 이리저리 튀긴다. 그게 정적을 깼다. 진동하면서도 단단함을 유지하던 감정이 그 소리가 만들어낸 파동에 닿아 폭발한다. 삶이 앞에 있었다. 스티븐은 환희에 싸여 떨림과 두려움과 함께 삶을 맞이했다.


“그녀의 모습은 그의 영혼 속에 영원토록 아로새겨져 어떠한 말로도 그의 황홀경이 빚어낸 거룩한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눈길로 그를 불렀을 때 그의 영혼은 그 부름에 화답했다. 살아가면서, 실수하기도 하면서, 추락하기도 하면서, 승리하기도 하면서,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리라! 어떤 야성적인 천사가, 인간적인 활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천사가, 삶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보낸 사자가 실수와 영광의 모든 길로 통하는 대문을 어느 황홀한 순간 활짝 열어주기 위해 그 앞에 돌연히 나타난 것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지!”


파동은 강력했다. 이미지들이 나를 깨웠다. 눈을 감고 언어를 그렸다. 폭력으로 찬 기억. 견딜 수 없는 욕망과 갈증. 아무도 더럽힐 수 없는 아름다움. 삶의 기쁨. 그러자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젖은 땅을 말려주는 빛이 내리고, 비가 내려 먼지가 씻긴 깨끗한 하늘이 빛과 손잡고 내게 널찍한 들판을 보여 주었다. 나는 어느 길이든 갈 수 있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삶과 욕망을 치밀하게 그려 낸 걸작이다. 젊은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투쟁과 부화, 자신을 붙잡는 낡은 가치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가로 탄생하는 이야기를 보았다.


텅 빈 무언가가 채워졌다. 내 마음속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어 열정을 잉태했다. 삶에, 아름다움에, 감정에 손을 뻗치고 싶은 강한 욕망이었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힘을 냈다. 내 모습을,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을 풀어놓아야지. 열심히 가꾸었으나 스스로 망가뜨린 들판 앞에 다시 서서 아름다움의 씨를 뿌렸다. 싹이 튼다. 솟아오른다. 그 힘으로 2년 반을 걸을 수 있었다. 그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적으며 다짐했다. "나는 예술가가 되겠다. 내 재능이 미치지 못해 모든 감정을 내보일 수 없어도, 내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예술가가 되지 못하고 평범한 존재로 남을지라도, 그래서 단 한 사람만이 나를 보아줄지라도 기꺼이. 예술가가 되리라.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리라. 오라, 오 인생이여(Welcome, O Life)!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해 나를 조각하리라."


그 마음은 지금도 같다. 오늘이 새롭게 출발하는 날은 아니지만 내가 적었던 말들을 잊지 않고 실천하리라 다짐한다. 작품 마지막 말을 덧붙인다.


고대의 아버지시여, 고대의 명장이시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저를 크게 도와주소서. Old father, old artificer, stand me now and ever in good stead.


또 덧붙이며:

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재미있게 읽었고, 지금도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이스가 사용한 플롯과 상징은 다시 생각하면 고루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 '대죄'로 빠지는 과정과 이피퍼니를 터뜨리는 불씨로 여자아이를 활용한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전자는 성매매이며, 후자는 남성 화자인 디덜러스가 여성 화자에게서 영감을 얻는 (오랫동안 활용되어 온)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이피퍼니는 내가 나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잘못된 점은 비판해야 한다. 더 이상 저 두 방법에 갇혀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배경화면]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2018년 1월 21일에 완성한 글을 2021년 1월 11일에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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