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윤석 Jun 13. 2020

마거릿 애트우드, <눈먼 암살자>

역사와 불합리의 무게는 개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평소에 칭찬을 한 번 하면 후하게 하는 편이다. 소설 <눈먼 암살자>도 그렇다. 인물, 문장, 짜임새, 주제, 시의성 모두에서 완벽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작품. 버리지 않을 책. 내가 읽은 최고의 비극. Masterpiece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 민음사



소설 <눈먼 암살자> (The Blind Assassin)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1939~) 지음. 2000년 발표.

차은정 옮김. 민음사, 2010.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2000년 소설. 이 작품으로 영어 문학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부커 상(The Booker Award)을 수상했다.


ⓒ Pari Dukovic/The New Yorker


애트우드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다. 대표작으로 <눈먼 암살자> 외에도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 <그레이스(Alias Grace)>가 있다. 1960년대부터 페미니즘,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사,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2017년에 <시녀 이야기>와 <그레이스>가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17년은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극단주의가 표출(영국 유럽연합 탈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된 가운데 성차별과 성폭력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음(#metoo)을 증명한 해였고, 드라마가 제작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애트우드는 이를 수십 년 전 정확히 ‘예측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 덕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점쳐지기도 했으며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헌사를 받았다.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이 리커버되어 출판되었다.


2019년에는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 <증언들(The Testaments)>을 출간했고, 다시 부커 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두 갈래, 네 가지 시점으로 전개된다. 홀수 장은 화자 아이리스 체이스가 쓴 자서전이다. 1998년, 여든두 살이 된 그는 과거를 회고하고 자신이 본 세상을 묘사한다. 짝수 장은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가  소설 <눈먼 암살자>다. 로라는 스물다섯 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작품 서두에서 언급된다. 당대의 신문 기사, 편지 등 아이리스가 모아 둔 자료가 첨부된다.


아이리스와 로라의 아버지 노벌 체이스는 큰 단추 공장을 소유했지만 미숙한 경영과 대공황으로 몰락하고 야심 많은 실업가 리처드 그리픈에게 공장을 넘긴다. 아이리스는 그 과정에서 리처드와 강제로 결혼하고, 동생 로라도 반강제로 리처드의 집에 들어간다. 로라는 이후 리처드에게 희생당하고 억압당하며, 아이리스도 리처드와 그 동생 위니프리드에게 눌려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눈먼 암살자>는 이름 있는 집안 사람이지만 어딘가에 묶여 있는 여자와 노동운동가 남자가 주인공이다. 남자는 먼 우주 자이크론이라는 행성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자는 생각을 나눈다. 계급사회가 휘두른 폭력에 해를 입은 눈먼 암살자와 혀가 잘려 말할 수 없는 소녀가 사랑에 빠져 도망치는 내용이다. 네 이야기는 처음에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로 향하면서 한 물줄기로 합쳐지고 비극과 파멸이라는 바다로 향한다.




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힘든데 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무나 부릴 수 없는 기교다. 틀을 뒤집고, 또 멋지게 해냈다. 주요 등장인물의 퇴장을 미리 알리고 시작한 뒤 그 원인을 추적하는 스토리라인은 신선하다. 각종 상징과 단서들을 배치하고 회수하는 능력은 무서울 정도다. 처음에는 단순한 상징과 사건으로 지나간 것들이 결말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되면서 소름이 돋았다.


문장은 예리하다. 당시 예순한 살 마거릿이 여든두 살 아이리스의 입을 통해 세상과 삶을 꿰뚫는 통찰을 전한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쉬운 언어 안에 담긴 뜻은 많은 생각을 부른다. 계속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죽은 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른 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주제는 뚜렷하고 거대하며 아직 살아 있다. 먼저 눈먼 칼날에 희생되었던 이들을 기억하는 '기억 소설'이다. 아이리스는 유일한 생존자다. “진실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다. 아이리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그를 기억하고 고백하기 위해 글을 쓴다. 살아남아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분명 위대한 과업이지만 은연중에 자신을 유리하게 포장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진실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쓰는 것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훗날의 나 자신조차도.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점을 알았는지 아이리스 스스로 온전한 진실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신이 오류를 저질렀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서술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는다. 실패를 기억하고 오류를 고백하는 일은 많은 용기를 요구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 진실을 물려주고자 하는 목표에 존경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먼 암살자>는 동시에 폭력과 권력 구조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애트우드는 많은 폭력 양상을 드러내고 독자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눈먼 욕망과 거래 대상이 되어 평생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희생당했던 아이리스와 로라의 이야기를 통해 페미니즘 담론을 제기한다. 로라를 두고 리처드와 아이리스가 나누는 대화로 이를 간단하게 압축할 수 있다.


"그녀는 악의로 그랬던 걸 거야. 나한테 앙갚음을 하려고 했던 것 뿐이야."
"그렇다 해도 별 놀라운 일은 아니군요. 그녀는 당신을 증오했을 거예요. 왜 안 그랬겠어요? 당신은 그녀를 강간한 거나 다름없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동의? 당신은 그걸 그렇게 부르나요? 나 같으면 협박이라고 부르겠어요."


1차 대전과 대공황, 스페인 내전, 2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숨 가쁘고 잔인한 역사가 개인들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를 처절하게 묘사한다. 계급 사회 아래 더러운 희생과 폭력이 행해지는 자이크론의 모습, 특히 귀족들이 아내와 자식을 팔아 빚을 청산하는 세태, 어린 나이에 카펫 공업에 동원되어 눈이 먼 아이들과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소녀들의 혀를 잘라버리는 모습에서 강력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처음 읽을 때는 로라가 무너지는 모습에만 집중했다. 끝내 붙잡혀 날아오르지 못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배신당해 추락한 이카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붙잡고 날개를 꺾어버린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에게 증오를 느꼈고 빼앗기기만 하고 힘없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러나 아이리스도 희생자였음을 잊었다. 아이리스도 분명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유는 역시 그도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깨닫자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강한 상실과 연민이 몰아쳐 나를 슬프게 했다.


또 소설 속의 소설, 눈먼 암살자와 자이크론 이야기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까. 배경은 너무 화나고 슬프지만. 눈먼 암살자와 말할 수 없는 소녀가 만날 때 느끼는 찌릿함과 자신들을 붙잡는 손아귀를 피해 달아나는 여정은 독자를 두근거리게 한다.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여자와 슬픈 결말을 만들고자 하는 남자의 다툼, 그 대안으로 나온 도마뱀 인간 이야기와 아어아 행성 이야기에서는 장르문학 냄새와 애트우드가 듬뿍 집어넣은 은유에 취해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마지막으로 시의성 있는 작품이다. 지금 <눈먼 암살자>를 읽는 일은 나에게 문학에 보이는 관심과 재미 그 이상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여성 억압 문화가 만연함을 알았다. '더 이상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살 수 없다'는 목소리를 똑똑히 듣는다. 그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던 시대 가려졌던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리픈 일가의 천박함과 추잡함에 분노하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본다. 나는 어떠했는가? 잘못되었다고 외치며 끊임없이 환기하고 반성해야 한다.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 <디도의 죽음>. Royal Collection Trust / ©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2020


말레나 에른만(Malena Ernman)의 2008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 공연.


노래 하나를 생각한다. Dido's Lament. 디도의 비가. 영국 음악가 헨리 퍼셀이 작곡한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라는 오페라에 실린 아리아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카르타고 왕 디도는 트로이 출신 영웅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아이네이아스가 그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떠나자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디도가 숨이 끊어지기 전, 탄식하며 부르는 비가다.


퍼셀 이전,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도 이 이야기를 토대로 시를 하나 지었다. 아이네이스. 바로 아이리스와 로라가 라틴어 시간에 배웠던 시. 그리고 아이리스가 로라의 공책에서 발견한 흔적.   


디도는 절망적으로 흐느낀다. Remember Me. But Forget My Fate. 나를 기억해 다오. 나를 기억해 주오. 그러나 내 운명은 잊어주오. 절제되면서도, 저 밑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무너지는 디도의 슬픔. 디도와 로라가 겹쳐 보였다. 내 느낌은 아이리스가 한 말과 같다. "지금 내가 빠져들고 있는 이 깊은 슬픔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도하지 않겠다."


나는 조용히, 곧고 떨리는 목소리가 주는 아이러니한 아름다움에 겨워 슬퍼한다. 탄식이 귀를 휩싸고 돈다.


[배경화면]

존 싱어 사전트(1856~1925), <마담 X의 초상>.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버전 <눈먼 암살자>의 표지로 사용되었다.


2018년 2월 20일에 완성한 글을 2021년 1월 11일에 고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