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 본 사람이면 이 제목에 공감할 것이다. 읽는 내내 감히 번역가를 수없이 의심한다. 심지어 번역가는 피터 한트케와 한트케의 문학 전문가이기도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를 의심한다. 직전 문단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내용을 체크한다. 이상하다. 한 문단 더 앞으로 돌아간다. 좋아, 딱 한 문단만 더 가보자.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 숏폼에 중독되면 안되는 건가, 생활 습관까지 점검한다. 잠시 전자책을 덮고 천장을 본다. 양쪽 승모가 단단하다. 두 손으로 뺨을 톡톡 치고 전자책을 펼친다. 닫는다. 그리고 한숨.
확실한 것은, 주인공 블로흐의 불안함이 소설 내내 은밀하게 또는 직관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주인공의 불안함에 기반한 행동만 따라가며 읽기에는 불안함의 묘사가 뛰어난 다른 작품들도 많기 때문에 한트케의 의도는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까지 드니 읽는 속도가 영 더디다.
그저 문장과 문단들의 집합으로 보면 좀 낫다. 주인공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모조리 묘사한다. 대화보다는 그 주변에 신경을 쓰느라 대화가 끊긴다. 상대와 연대해야 할 감정들은 증발하고 대화 당시 주변의 시각적 정보만 남는다. 그 감각이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다. 가령, 흐르는 물 속의 어린이 시체는 충격적 감정의 시발점이 아니라 담벼락, 꽃, 커피잔 같은 일상의 한 장면이다. 직후, 순경을 마주한 순간에도 순경의 표정, 행동, 주변에 대한 시각적 감각만 나열한다. 이후 어느 여인숙으로 들어가 홀로 카드놀이를 한다.
문장들 혹은 문단들 간에 연계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연계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연계성이 직전 문장, 직전 문단과 붙어 있다는 보장은 더욱이 없다. 그러다보니 각 문장과 문단이 모두 다른 날짜, 다른 장소에서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같다. 개별적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이음새 없이, 결과의 연속이다. 읽는 내내 대부분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데, 이 현상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나는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가. 원인 없는 결과로만 가득찬, 감각은 있지만 감정은 없는 블로흐는 자기 삶과 세상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개별성. 그러고보니, 주인공은 전체를 보지 않거나, 그 능력 자체가 없다. 블로흐의 이러한 특성은 갑자기 작가가 작품 속에 등장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고 앉아 화면 속에서 진행되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어 말을 중단하고 표현 가능한 문장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 여기저기에서 개별적인 것들이 보였다."
"단면의 안쪽에서 그는 개별적인 것들을 점점 분명하게 보았다. 그가 본 부분들이 전체를 위해 서 있는 것 같았다."
“상점들이 너무 빽빽이 들어서 있어서 아무것도 가리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물건들이 서로를 가렸기 때문이다.”
대화가 전개되나 싶다가도 블로흐는 대화 내용보다 그 대화를 이루는 개별 요소로 옮겨간다. 예를 들어, 단어나 표현의 적합성을 따진다.
"누군가 그에게 집시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아예 부인하거나 혹은 소시지 빵을 먹느라 못 봤다는 구실을 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집시 연행의 증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증인이라고?’ 블로흐는 우체국에서 전화 연결을 기다리며 멈칫했다. ‘고백한다?’ 이러한 낱말들이 그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 낱말들은 그가 지금 막 부정하려고 했던 의미를 가지고 있기나 한 걸까? ‘부정한다?’ 블로흐는 다시 멈칫했다."
" ‘병’이란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면서 몇 번 반복해 보면 웃음을 띠게 된다. ‘나는 병에 걸렸다.’ 우습다. ‘나는 아프다.’ 똑같이 우습다. ‘우체국 여직원과 우편배달부’, ‘우편배달부와 우체국 여직원’, ‘우체국 여직원과 우편배달부’. 더할 나위 없는 위트다. 당신은 우편배달부와 우체국 여직원에 관한 위트를 알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표제처럼 생각된다.’라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축하 전보’, ‘잉크병의 뚜껑’, ‘마룻바닥의 압지 부스러기’."
그나마 전달력을 가지던 풍경 묘사도 후반부로 가면 문자로, 문자는 기호로 돌변한다. 단순화의 연속이다.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풍경들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를 위해서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가 바라보는 주위 풍경들은 글자의 형상으로 그의 눈에 확 들어와 박혔다. ‘호출 부호 같군.’ 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지시문 같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타났다."
그리고 끝내 다다른, 부처님도 울고 갈 문제의 부분.
시각 정보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기호로, 기호를 빈 칸으로. 한트케는 원래 실험적이고 독창적이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노벨문학상(2019) 선정 시 한림원의 코멘트 역시 동일했다. 나는 노코멘트하겠다.
한트케는 블로흐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독특하게도, 좁아서 생기는 한계가 아니라, 넓어서 생기는 한계다. 이 작품에서는 그 부분을 캐치하기가 어려운데, 몇몇 심층독자(heavy reader 랄까...)나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의 언어는 경험을 앞지른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해"라던가 "상식적으로", "세상이 미쳐돌아간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 밖에도 무수히 많다. 상식은 누가 정의하고, 세상이라 함은 모든 지구인이 그렇다는 뜻인가? 물론 앞선 예시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어찌되었건 이러한 표현의 반복은 상상의 테두리를 굳힌다. 즉, 개별 경험이 일반화 속에 흡수되어 뭉개지는 것이다. "네가 잘못 기억하는거야" 역시 내 경험을 제한한다. 내가 그렇다는데, 무슨 근거로 내 경험을 부정하는가. "암튼 넌 특이해"라고 수없이 들으면 처음엔 그렇지 않다가도 스스로 동의하게 되고 결국 난 세상과 다른 종자가 되어있다.
전직 골키퍼였던 블로흐는 상대가 내가 뛸 방향을, 내가 뱉을 언어를 예측, 예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동시에 불안을 느낀다. 한수, 두수 앞서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하는 골키퍼는 그저 불안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상대의 이해력이 너무 낮아, 왜곡의 위험성이 높아, 혹은, 나의 역량 부족으로 설명이 어려운 경우 소통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한트케가 말하는 언어의 한계에 공감한다. 누구나 모든 것을 편집할 수 있고, 상대가 왜곡하여 이해하고 과장하여 전달하기를 의도하는 조회수 바라기 콘텐츠가 범람한다. 이러한 도파민 듬뿍 묻은 시대적 언어 습성이 1인 미디어를 통해 뿌려진다. 이 시대에 한트케의 메시지는 더 뾰족해진다.
한트케를 미워하며 시작한 리뷰가, 너무 공감으로 끝나는 것이, 역시나 언어의 한계이자 유연성이다. 언어는 어렵다.
아. 그리고 한트케는 정치 성향으로 논란이 많았던 작가인데, 그냥 이 책에 대한 나와의 논란이 더 크므로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