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전락 (L' Chute)

추락이 아닌 전락으로 번역한, 번역가 당신은 천재.

by Yunus 유누스

1. 클라망스에게 속지말 것. 솔직함이 선과 악의 기준은 아니다.

『전락』의 클라망스는 솔직하다. 자신은 정의로운 변호사였지만 그 정의는 사회적 정의 실현보다는 자신을 우월하게 만드는 요소였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솔직함은 아무것도 구제하지 못한다. 센 강에서 여자가 뛰어내리던 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후의 고백은 이 선택을 지우지 못한다. 침묵해도 악이고, 고백해도 악은 남는다. 그래서 분명해진다. 솔직함은 태도일 수는 있어도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클라망스는 마치 '나 이만큼 솔직한 사람이야. 위대하지. 그러니까 내가 행한 악의 강도를 조금 낮출 수 있고, 악을 고백하지 않는 자보다 훨씬 우월해. 따라서 내가 가진 타인 비판의 권한은 좀 더 인정받아야 해'라고 말한다. 도둑이 도둑질을 고백했다고 해서, 그 과거가 없어지거나 꾸며질 수 없다.

2. 클라망스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클라망스는 프랑스어로 관용, 자비를 뜻한다. 장 바티스트는 회개를 외치던 세례 요한의 이름이다. 이 두 이름이 합쳐진 인물은 회개를 말하지만 관용을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자비를 상징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자비를 주지도 받지도 못한다. 이 이름은 성격 묘사가 아니라 구조다. 카뮈는 처음부터 이 인물을 실패한 도덕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이름 자체가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3. 평판은 판단의 자격이 아닌, 권력이다

클라망스는 판단할 자격이 있어 보였던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정의로운 변호사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래서 그의 판단은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전락』은 이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판단의 무게는 도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위치와 평판에서 나온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의 판단은 정의가 되고, 어떤 사람의 판단은 위선이 된다. 센 강 사건 이후, 클라망스는 자신이 더 이상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는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판단의 형식을 바꾼다. 도덕 대신 고백을 말한다.

4. 판단을 거부한 사람은 판결을 개인화한다

클라망스는 무신론자다. 그는 신의 판결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판단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판결받기를 거부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법정을 떠나 술집으로 간다. 암스테르담의 ‘멕시코시티’는 법과 신이 희미해지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는 타인을 심문한다. 질문하지 않지만 말하게 만든다. 듣는 사람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이미 참여다. 『전락』은 판단이 사라진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 판단이 통제되지 않는 세계를 그린다. 판단이 개인의 입과 언어 속으로 숨어버린 세계다.

5. 인정은 빠르지만, 사과와 회복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클라망스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인정한다. 자기 비겁함과 위선을 해부하듯 말한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는다. 사과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죽었고, 법은 그를 부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드러난다. 죄책감은 내 문제지만, 손해는 타인의 문제다. 클라망스의 고백에는 손해가 없다. 그래서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책임도 없다. 그는 죄에 머무르지만, 그 죄를 선이나 중립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죄를 언어로 늘린다. 고백은 회복이 아니라 정지가 된다.

6. 양심만 남은 세계는 가장 위험하다

『전락』은 양심을 부정하지 않는다. 클라망스는 양심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밤마다 웃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비겁함을 잊지 못한다. 문제는 이 양심이 어떤 제도와도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 양심은 책임이 아니라 감상이 된다. 클라망스는 법을 너무 잘 알기에, 법이 닿지 않는 장소

를 선택한다. 암스테르담, 안개, 술집, 익명성. 『전락』은 법 없는 양심이 얼마나 쉽게 자기연민과 자기연출로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7. 고백은 참회가 아니라 공범 만들기가 될 수 있다

소설 후반부에서 클라망스의 고백은 방향을 바꾼다. 그는 더 이상 자신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순간 고백은 완성되는 동시에 타락한다. 죄는 나뉘고, 나뉜 죄는 가벼워진다. 그는 더 이상 혼자 죄인이 아니다. 고백은 윤리가 아니라 전략이 된다. 판단을 피하기 위해, 판결을 유예하기 위해, 죄를 공동화한다. 『전락』은 고백이 언제든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 이 모든 것은 카뮈 자신의 삶과도 겹친다

카뮈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매우 양심적인 인물이었다. 폭력과 살인을 일관되게 거부했고, 어떤 진영에도 쉽게 서지 않았다. 하지만 사적인 삶에서는 분명한 실패를 안고 있었다. 특히 여성 관계에서 그는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중요한 건 이 모순을 그가 몰랐느냐는 점이다. 『전락』은 이 모순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쓰인 작품에 가깝다. 이 소설은 도덕 선언이 아니라 자기 기소다. 카뮈는 말할 자격이 있는 인간을 그리지 않는다. 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을 그린다.

9. 『전락』이 끝내 묻는 질문

이 소설은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조건을 묻는다. 나는 판단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판단을 피하기 위해 먼저 판단을 거부하고 있는가. 나의 솔직함은 책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보호하는 언어에 그치고 있는가. 카뮈는 답하지 않는다. 클라망스도 답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를 침묵한 청자의 자리에 앉힌다. 이미 공범이 되어버린 자리. 『전락』은 그 자리에서만 완성되는 소설이다.

10. (사소하지만) 암스테르담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다시 한 번 멕시코시티로 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장소가 현실에서 어긋나 있음을 말해준다. 클라망스는 늘 어긋난 자리에서 말한다.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롭지 않았고, 고백을 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다. 멕시코시티라는 이름은 이 어긋남의 상징이다. 유럽의 중심에서 가장 먼 곳, 질서와 법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도시의 이름. 클라망스는 법의 도시에서 추방된 사람처럼 이 술집에 앉아 있다. 그는 더 이상 법정에 서지 않는다. 대신 술집에서 말한다. 공적인 판단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적인 언어만 남는다. 그래서 이 공간은 고백의 장소이자, 재판이 끝난 뒤의 대기실 같다. 이미 판결은 내려졌고, 그는 그 판결을 반복해서 설명할 뿐이다. 멕시코시티는 도피처가 아니라, 몰락 이후에 도착한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