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다. 올해가 가기 전 남기고 싶었다. 나는 보편적인 무속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굿판에서 천황 ( 노래나 춤을 부리는 일 )을 잡지도 못하고, 방울을 들지도 않는다. 며칠 전 브런치 독자 중 한 분이 점 보러 오셨는데, 무속인 맞으시냐 – 고 물었다. 법당과 탱화가 있고, 손님 맞아 점도 본다만 ‘ 무속인 ’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다른 모양이다. ( 손님께 이렇게 언급해도 되냐 여쭙고 씁니다. )
나는 대학 3학년 2학기 마치고 신 받았고, 몇 번 휴학 후에 무속인 2년 차에 졸업했다. 그때도 무속인이 대학생이라서, 어떻게 무속인 됐냐 질문 더러 받았는데 오늘에야 정리해 본다. 어쩌면 무속인에 관한 세상 관념에 흠집 내는 얘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경주 이씨 월성군파 45대손이다. 정확히는 경주 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라 하겠다. 우리 집안 시조부터 따지면 너무 먼 과거로 흐르고, 나의 아버지는 월성군후 용재공파, 즉 중시조 용재 이종준 선생을 극진히 말씀하셨다. 중시조 용재 이종준 선생은 나로 따지면 17대 조부가 된다. 이분은 조선 학자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해 영남 사림파 중 한 분이셨는데 23세 사마시 합격, 33세 문과 급제, 40세 사헌부 지평, 41세 의성 현령과 의정부사인에 이른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귀양 가는 도중 마곡역에 연산군을 원망하는 시조를 써 붙였다는 혐의로 국문을 당하고 돌아가신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증된다.
아버지는 내게 경주이씨 월성군파, 혹은 용재공파라 가르치며 집안 대대로 내려온 학맥에 관해 자주 얘기했고, 용재 이종준 선생에 이어 나의 6대 조부인 만오공 이상현 선생에 대해서 강조했다. 만오공 이상현 선생은 조선말 고종 집권 시기 영의정을 지낸 귤산공 이유원의 친척이자 벗으로, 선인들의 문집을 재편찬하고 학문과 인격 수양을 강조하며 [ 만오공일고 ] 라는 문헌을 남기셨다. 당시 만오공 이상현 선생의 수학량이 대단하고, 선비 됨을 전파한 고을 유지쯤 되었으니 우리 집과 일가친척은 이분을 높이 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6대 조부이신 만오공 이상현 선생과 5대 조부, 4대 조부 때 고서들을 지금껏 모시고 있다.
그리하야 학문에 정진해 후학 양상에 힘쓴 집안 명맥답게 무속인 나오면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는 몸 아프고 정신 아파도 우리 집안에 무속인 나오는 게 말 되냐는 아버지 성화에 골골 앓아가며 몇 해를 버텼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도 동네 유지쯤 됐고, 형제는 전국 석차 80위권 안에는 꼭 들다가, 졸업 후 정치판 기웃거렸으니 ( 현재 아님 ) 우리 집에서 무속인 나왔다면 사람들 다 이상하게 볼 일이었다. 물론 난 아니다. 나는 무속인 통과 치레 거하게 치렀다. 몸 아프고 정신 아파 패악질 부렸고, 정신 잃고 길에서 쓰러졌다. 말하자면 집안 골칫덩어리였다. 나는 무속인 되고 집안 돌보고 말 잘 듣고 바르게 살아서 과거에 아팠던 게 정말 신병이라는 걸 다 보여줬다. 때문에 사람들은 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학자 명맥 잇는 집안에서 어떻게 무속인 나오냐는 사람들 의구심도 반갑다. 들려줄 기회 온 것 같다.
나는 나의 5대 조부를 대신으로 모시고 점을 본다. 이분은 나 신 받는 날, 우리 집은 학자요 선비니 방울과는 거리가 멀다. 방울들 일은 없다. 다만, 내 팔자가 신 받지 않으면 일찍 죽고, 당신은 살아생전 학문에 정진하며 사주와 풍수지리도 잘 보셨으니 학문으로 점 볼 수 있다 하셨다. 그게 내가 방울 안 드는 이유다. 그렇다면 나는 왜 명 짧으며, 학자 핏줄에 무속인은 왜 나올 수 있는지 적어보겠다.이건 나의 얘기이자 여러분의 얘기다. 왜냐고. 나는 이곳에 나처럼 윗대 조부들이 선비로 양반으로 후학 양성에 힘쓴 집 자식들 많은 걸 안다. 당신들이 나처럼 신 받고 살 팔자는 아니라도, 당신 집안과 우리 집안은 분명 닮은 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얘기이자 여러분의 얘기인 것이다. [ 2화에서 계속 ]
무진년(戊辰年)에 서울과 시골에 있는 족친들과 의논하여 종중선배(宗中先輩) 여러분의 금석록(金石錄)을 닦으니 귤산상공(橘山相公) 유원(裕元) 씨가 실상은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문헌(文獻, 족친 선현의 글)을 모으고 찾는 일은 공에게 위임하니 공이 종친가(宗親家) 여러 집을 두루 상고하여 빠짐없이 모아서 책 열 권[十卷]을 만들고 한 질[一帙]식 두루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