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 다녀왔다. 다녀오자마자 쓴다. 화가 나고, 부아가 차고, 운전하는 내내 골몰했다. 정신 차려 보니 부산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팔자 고쳐보겠다고 잘 나가는 사람 꽁무니 쫓고, 기생충처럼 붙어먹는 인간들에게 환멸이 났다. 그런 사람도 돌보는 게 제자라는 걸 안다. 그래서 쓰는 글이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살자고. 얼마나 사는 게 억울했으면 그러겠냐는 말은 사양이다. 나도 사는 게 억울해서 누구보다 죽겠다고 덤볐다. 그러나 팔자 고쳐보겠다고 그러진 않았다.
타인을 나무라기에 앞서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 되는지 한 번 돌아보자. 나는 신 받은 이래로 인간의 욕심이라 일컫는 맥락을 전부 포기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면 신 받은 이래로 ‘ 이래도 괜찮겠지 ’ 따위의 합리화는 한순간도 없다는 말이다. 나는 살면서 나처럼 사는 사람을 본 적 없다. 맹세할 수 있다. 한 번쯤 이래도 되겠지, 이득을 위해 불쌍한 사람을 속여도 되겠지, 누군가 나쁜 사람인 줄 알지만 편들어도 되겠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내게 조금의 득도 안 되지만 괜찮아질 날 오겠지, 내 욕심에 시들어가는 사람이 보이지만 괜찮겠지, 이따위 구구절절한 합리화는 내 제자 길에 단 한 줄도 없었다는 말이다. 꼭 내가 제자라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그런 합리화가 없어야 어디서든 큰소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큰소리 못 치면 병을 앓는다. 사람들은 내가 배짱 좋고, 성격 드세서 그런 줄 아는 모양인데 나는 나처럼 살기 때문에 큰소리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한 모양새가 내 제자 길에 이득을 가져다주는 건 사실이겠다. 내 말은 앞뒤가 같아서 거스르는 사람이 억지라는 게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계속해보자. 나는 요즘 환멸이 날 대로 났다. 대체 사람들은 왜 타자의 삶을 훔치려 드는가. 잘 나가는 친구, 잘 나가는 선후배, 잘 나가는 누군가의 궤적을 쫓는가. 좋다. 그들을 일종의 동기로 삼는 건 괜찮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못함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을 미워하게 되거나,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섬광을 같이 누리길 바라거나, 그들이 되지 못한 스스로를 한없이 미워하는 사태에 처하냐는 말이다. 왜, 꼭, 누군가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게 네 인생인 것처럼 스스로를 못나게 내버려 두냐는 말이다. 여기서 조금 더 미치면 그들의 명예나 섬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 꽁무니 빤 시간이 있고, 그것의 대가로 누려도 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뼈와 살을 깎아 명예나 섬광을 얻은 이들 것을 함께 누리길 바란다면 꽁무니 빠는 건 당연한 일이다. 빤 쪽이 억울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절절 날뛰는 내가 싫어 죽겠다. 이런 철면피도 중생이랍시고 이해하라는 신도 밉고 내 인생도 밉고 나도 밉고 그렇다. 물론 안다. 나는 신 말은 거역할 수 없어서 이토록 펄펄 날뛰다가 이윽고 잠잠해지고, 웃으며 이들을 맞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너는 억울할 일이 없다고, 세상 다정하고 잘생긴 미소로 마주 앉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태어난 이유, 부여된 임무가 다 다르다는 걸 안다. 나로 말하자면 가슴에 화가 절절 끓는데 제대로 식혀 바른말만 하는 게 임무인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이 그토록 뻔뻔한 건 애당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일까.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대충 꽁무니 쫓다가 쉽게 누려 먹으면 그만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