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우 Jun 26. 2024

저는 자주 화가 나고 참을 생각은 딱히 없어요.

 남해에 다녀왔다. 다녀오자마자 쓴다. 화가 나고, 부아가 차고, 운전하는 내내 골몰했다. 정신 차려 보니 부산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팔자 고쳐보겠다고 잘 나가는 사람 꽁무니 쫓고, 기생충처럼 붙어먹는 인간들에게 환멸이 났다. 그런 사람도 돌보는 게 제자라는 걸 안다. 그래서 쓰는 글이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살자고. 얼마나 사는 게 억울했으면 그러겠냐는 말은 사양이다. 나도 사는 게 억울해서 누구보다 죽겠다고 덤볐다. 그러나 팔자 고쳐보겠다고 그러진 않았다.


 타인을 나무라기에 앞서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 되는지 한 번 돌아보자. 나는 신 받은 이래로 인간의 욕심이라 일컫는 맥락을 전부 포기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면 신 받은 이래로 ‘ 이래도 괜찮겠지 ’ 따위의 합리화는 한순간도 없다는 말이다. 나는 살면서 나처럼 사는 사람을 본 적 없다. 맹세할 수 있다. 한 번쯤 이래도 되겠지, 이득을 위해 불쌍한 사람을 속여도 되겠지, 누군가 나쁜 사람인 줄 알지만 편들어도 되겠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내게 조금의 득도 안 되지만 괜찮아질 날 오겠지, 내 욕심에 시들어가는 사람이 보이지만 괜찮겠지, 이따위 구구절절한 합리화는 내 제자 길에 단 한 줄도 없었다는 말이다. 꼭 내가 제자라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그런 합리화가 없어야 어디서든 큰소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큰소리 못 치면 병을 앓는다. 사람들은 내가 배짱 좋고, 성격 드세서 그런 줄 아는 모양인데 나는 나처럼 살기 때문에 큰소리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한 모양새가 내 제자 길에 이득을 가져다주는 건 사실이겠다. 내 말은 앞뒤가 같아서 거스르는 사람이 억지라는 게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계속해보자. 나는 요즘 환멸이 날 대로 났다. 대체 사람들은 왜 타자의 삶을 훔치려 드는가. 잘 나가는 친구, 잘 나가는 선후배, 잘 나가는 누군가의 궤적을 쫓는가. 좋다. 그들을 일종의 동기로 삼는 건 괜찮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못함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을 미워하게 되거나,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섬광을 같이 누리길 바라거나, 그들이 되지 못한 스스로를 한없이 미워하는 사태에 처하냐는 말이다. 왜, 꼭, 누군가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게 네 인생인 것처럼 스스로를 못나게 내버려 두냐는 말이다. 여기서 조금 더 미치면 그들의 명예나 섬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 꽁무니 빤 시간이 있고, 그것의 대가로 누려도 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뼈와 살을 깎아 명예나 섬광을 얻은 이들 것을 함께 누리길 바란다면 꽁무니 빠는 건 당연한 일이다. 빤 쪽이 억울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절절 날뛰는 내가 싫어 죽겠다. 이런 철면피도 중생이랍시고 이해하라는 신도 밉고 내 인생도 밉고 나도 밉고 그렇다. 물론 안다. 나는 신 말은 거역할 수 없어서 이토록 펄펄 날뛰다가 이윽고 잠잠해지고, 웃으며 이들을 맞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너는 억울할 일이 없다고, 세상 다정하고 잘생긴 미소로 마주 앉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태어난 이유, 부여된 임무가 다 다르다는 걸 안다. 나로 말하자면 가슴에 화가 절절 끓는데 제대로 식혀 바른말만 하는 게 임무인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이 그토록 뻔뻔한 건 애당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일까.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대충 꽁무니 쫓다가 쉽게 누려 먹으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 이상, 남해 여행기는 추후 올라온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작가의 이전글 늘 감사한 여러분께, 마음을 담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