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오마카세가 반짝 유행했잖은가. 내 첫 오마카세는 20대 초반에 광화문 오가와였다. 그때는 오마카세라는 문화가 나같이 ‘ 젊은 사람들 ’ 사이에서 유행하지도 않았고, 이제 막 우리 또래가 미식에 관심을 가질 듯 말 듯할 때였는데 나는 없는 돈을 빌려서라도 오마카세니, 파인 다이닝이니 하는 곳을 혼자 찾아다녔다.
내 신병 증상 중 하나는 낮이고 밤이고 미친 사람처럼 걸어 다니는 거였는데, 이렇게 비싼 식당에서 실컷 먹고 나면 지하철 2호선을 따라 서울 한 바퀴를 돌곤 했다. 몸과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말거나, 내 뱃속에 들어가는 것들은 비싸고 기름졌는데, 부모님이 그 돈을 대주지는 않으셨고 친구들에게 빌리고 갚으면서 서울의 비싼 식당들을 섭렵하곤 했다.
없는 돈을 빌리고 만들어서라도 하고 싶은 건 해야겠다고, 내 이미지는 안중에도 없고 때로 염치도 없는 이 마음가짐은 아주 오랜 시간 내 속에 있었다. 요즘 나는 이렇게는 살면 안 되겠다, 집을 팔아서라도 원하는 건 갖는다는 식의 어쩌면 배짱, 어쩌면 미친 짓을 이제는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합리적으로 세상 사는 법도 있다는 걸 깨달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마을 당산 아래, 한옥 두 채를 나란히 지어 미미와 함께 사는 것만이 나의 꿈이다. 글도 쓰고, 작은 텃밭도 가꾸고, 손님도 맞고, 지나가는 이들도 들러 기도하고, 딱 그렇게만 살면 될 것 같다. 속세의 것들은 이미 내 손에 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 남았어도 괜찮다. 이상하리만치 미련도 없고, 관심도 없고, 거기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는 대로 보게 된다. 이러다가 혹시 모르지, 또 이것도 누리고 저것도 가질 거라 말할지도. 그러나 그때는 미미든, 가족이든 나를 잡아줄 것이고, 나는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그들 손에 이끌려 갈 것이다.
아버지가 곧 옆집으로 이사 올 것 같다. 옆집까지는 아니라도 같은 아파트 옆 동 정도. 옆집이 곧 이사를 떠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아빠가 올 수 있으면 좋고, 안 되면 같은 아파트 정도로 마무리될 것 같다. 나는 세상이 인정한 효자인데 아빠의 아침과 저녁을 해다 먹이고, 간식을 챙기고, 내 일도 야무지게 하고, 아빠의 뒤치다꺼리를 다 해낸다. 아빠 나이가 들수록 내 손이 필요할 때가 많고, 급기야 부모 자식의 관계가 뒤집혀 마치 내가 부모이고 아빠가 자식인 듯 움직이지만 우리 어릴 적 부모 손을 빌려 컸기 때문에 자라서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아빠만 이사 오면 우리 동네는 온 가족이 모여 사는 하나의 군락이 된다. 나의 가족, 내 스승의 가족, 내 친구의 가족, 온 가족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그 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살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될 거였다는 듯 이 상상이 전혀 낯설지 않다.
오전 일광 기도를 마치고 쓴 글은 마음 한편에 있던 욕심을 소거하고, 영영 보내는 작업과 비슷하다. 과거 얘기로 시작해 현재로 도달하고, 무엇을 버렸는지 확인하고, 다시는 취하지 말자 마음먹게 된다. 서울을 떠나지 못할 것 같던 나, 부산에 왕왕 적응해 버린 나,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나, 욕심을 버릴 수 있는 나, 가족보다 중한 게 없는 나를 만났다. 이제 미미를 데리고 당산에 올라야 한다. 올해는 꼬박 기도만 하고 보낼 것이다. 신들은 내게 버리고 포기해야 할 마음, 그 자리에 들어찰 새 마음을 알려줄 것이다. 내 일은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