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검은 고양이가 찾아온다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있다면 나라고 생각했다. 땅딸막하고 토마토처럼 동그란 얼굴에 뚱한 표정을 한 귀엽지 못한 여자아이. 타고난 재주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어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름값 한 번 제대로 하는 아이였다. 순하고, 표정만큼은 참된 아이였다. 속을 숨기는 건 할 줄도 몰라서 미움도 살 법한 아이였는데 눈에 띄지 않다 보니 사건사고에 휘말린 적도 없이 혼자인 적이 많았다. 반면에 언니는 재주가 많은 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로 끼가 넘쳤다. 그 옆에서 나는 언니가 좋아서 쫓아다니다가 언니가 미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언니의 뒷모습을 노려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요령도 없는 아이가 나였다.
하지만 어떤 아이라도 좋아하는 것은 있다. 나는 판타지 소설과 소년만화를 좋아했다. 물론 그마저도 열정 넘치게 좋아했던 것은 아니고 오즈의 마법사, 해리포터, 타라덩컨, 나니아연대기, 반지의 제왕 같은 유명한 작품들을 좋아하는 정도였지만. 만화도 만화책을 빌려본 적은 없고 그냥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만화를 챙겨보는 정도였다. 지금도 무언가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재주는 없다. 별로 그런 성격이 못 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시리즈를 다 챙겨 보고 만화는 본방을 놓치면 재방송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던 걸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좋아했다. 환상적인 이야기는 보통 비슷하게 시작된다. 너무 평범해서 보잘것없거나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소외된 약한 아이들에게 검은 고양이처럼 특별한 존재가 찾아온다. 그리고 속삭이는 거다. 날 따라오렴, 너는 마법사란다. 옷장 너머의 세계처럼 신기한 세계에서 그 아이는 전혀 평범하지 않다. 마법을 쓰거나 초인적인 힘을 쓰는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고 많은 경우 아주 특별한 힘이나 핏줄을 타고나기도 한다. 나는 호그와트의 마법세계를 체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리포터처럼 '특별한' 아이가 되고 싶어서 부름을 기다렸다. 마법이 찾아와 주기를, 너는 사실 평범하지 않다고 말해주기를, 모두가 나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주목하는 아주 특별한 세상으로 갈 수 있기를! 하지만 어린 시절은 꿈은 많은 경우 그저 꿈으로 머무른다.
보통 10살이나 11살 생일쯤 마법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시점을 지나고부터는 나는 마법사보다는 좀 더 있을 법한 꿈을 꿨다. 동화와 디즈니, 그리고 비밀의 화원이나 작은 백마, 소공녀처럼 출생의 비밀이나 색다른 일상이 벌어지는 곳으로 떠나게 되는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판타지가 아닌 소설에도 빠져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평범했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모험을 겪었다. 나에게도 갑자기 그런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나와는 전혀 다른 어떤 '특별한' 전학생을 만나 비일상적인 사건에 휘말릴지도 몰라! 하지만 세상은 얄궂게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해서 몇 번이나 읽었던 소설 시간의 주름은 그저 사랑을 깨달았을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끝이 났고,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의 이야기인 유진과 유진에서 큰 유진이는 친구가 유명한 작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나에게 평범함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유명한 작가인 친구를 두는 것. 그것이 큰 유진이가 꿈꿀 수 있는 특별함의 한계였다. 나는 그 한계에 상처받았지만 오랜 좌절 끝에 인정했다. 나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다음부터는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인정받는 수밖에 없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친구관계도 쉽지 않으니 유명인사가 될 그런 친구를 사귈 일조차 없어 보였다. 그냥 내가 이 사회에서 내 자리를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믿으며 내게 갈 길을 오로지 공부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특별한 아이도 평범한 아이도 되지 못한 채 까탈스럽고 예민한 유별난 아이가 되어 있었고 무뚝뚝하고 요령 없는 모습은 나를 또래집단에서 겉돌게 만들었다.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그런 세계가 또래집단이었다. 좋은 친구도 한두 명쯤 있었지만 나는 늘 외로웠다. 이상한 아이가 된 것 같아서 힘들었다. 나는 그저 마법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옷장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기를 바랐을 뿐인데. 검은 고양이가 찾아와 내게 속삭여주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런 걸 인터넷에서는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어린아이처럼, 환상적인 동화 속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
이상한 데서만 눈치가 빠른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마법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 마음이 나를 망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이십 대가 된 나는 여전히 검은 고양이를 기다리며 기도했다.
나는 마법사가 되고 싶어. 아직도, 여전히,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