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차 : 시간을 달리는 법, 소개, 산방산 전설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시간을 달리는 법


샛별을 보며 어둠 속에서 요가를 하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나 홀로 잠들던 침대에 엄마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엄마를 깨우지 않으려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움직이다가 막 어둠이 걷힌 바깥으로 나와보니 아직도 달이 노랗게 떠 있었다. 마치 해처럼.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해가 수면 위로 떠올지 않아서 일출 직전의 붉은 하늘을 등지고 왔다. 그리고 정말로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밝았다. 꼭 밤에서 아침으로 달려 건너온 기분이다. 그 이상한 상쾌함 속에서 내일도 달리고 싶어졌다. 쉬는 날이고 무리하면 무릎이 상하니까 참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싶어 하고 숨이 차는 순간을 즐기는 내가 낯설고도 반갑다.



단백질을 섭취하고 씻고 나와 쉬고 있는데 엄마가 자다 깨다 하며 계속 몇 시냐고 물어왔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서 아무리 기다려도 8시가 오지 않는다. 아침엔 시간이 정말 안 가, 엄마. 우리가 달려서 뛰어넘어야 해.

그런 엉뚱한 대답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개



찾아온 가족들에게 내가 매일 걷는 길을 소개하는 순간은 짜릿하다. 나는 잠시 이곳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아니라 이쪽에 더 속해 있는 듯한 그런 기분. 서울에서 멀어진 듯한 그 감각이 간질간질했다.

씻고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여전히 젖어 있었던 히피펌을 한 머리카락, 수면을 가르고 솟아오른 바위들, 건조하지만 강한 돌풍, 구름 너머로 고개를 내민 태양, 그 아래 언제나와 같은 범섬.

반쯤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모두에게 바다를 소개한 아침이었다.





산방산 전설



바닷가를 산책하고 산방산 쪽으로 향했다. 산방산은 한라산에서 무너져 내린 봉우리라고 한다. 커다란 한라산에서 독립해 나온 산의 거친 암벽이 그 위용을 자랑했다. 압도적이다. 근방의 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깎아지른 절벽들로 이루어진 그 큰 바위산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쏟아져 내려올 것 같지 않은 산이기도 하다. 흙이 아니라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어서 부서지더라도 무너지지는 않을 듯하다.


산방산에는 옥황상제, 승려, 영웅, 진시황, 그리고 여신의 전설이 석굴처럼 잠들어 있다. 여기서도 옥황상제는 또 바위산을 집어던진 성질 나쁜 놈이다. 옥황상제가 만들어낸 자연물들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면모에서 태어난다. 설문대할망의 전설과는 많이 비교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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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 앞은 유채꽃으로 유명한 서귀포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채꽃 명소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는 법환마을 올레길의 유채꽃길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산방산 앞에 있는 유채꽃밭들은 유채꽃이 만발한 사이에서 산방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만의 매력을 갖는다. 산방산 앞에 처음으로 유채꽃밭을 가꾼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런 풍경과 관광 상품을 누가 만들었을까?


제주도를 그저 관광지나 소비의 공간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쩐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입장료 천원은 관광상품 이상의 의미를 상상하게 한다. 이를테면 기묘한 제의적인 의도 같은 것을 말이다. 산방산의 전설을 숨은 이야기로 남겨두려 하고, 강렬한 노란빛으로 압도적인 바위산의 기세를 막아보려는 그런 제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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