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차 : 위선, 난조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위선


좋았지만 오랜만에 사람들과 함께하니 힘들기도 했던 이틀 간의 여행은 어떤 충돌하는 감정들을 동반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렸던 것은 먹는 일이었다. 육류와 유제품 소비를 줄이겠다는 마음이 절로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나 아늑한 분위기에, 그리고 남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편안함에 쉽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특히 어제 점심때 산방산 근처 용머리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 갔을 때 찝찝함을 안고서도 너무 즐기는 내 모습이 불편했다. 최대한 채소 위주의 음식을 주문하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음식이 나오니 안 먹던 소고기와 치즈에도 손이 갔다.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조금씩 해나가면 되는 일이라곤 하지만 신념이 흔들리는 순간에 스스로가 곱게 보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있어야 다음에는 달라질 수 있기도 하다. 그렇게 육류 앞에서 너무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마음속에 불편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리고 저녁은 많이 달랐다. 가족들이 제주도에 온 만큼 육류를 먹고 싶어 했고 나도 돼지고기는 줄이고 있는 중이지 완전히 소비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닌 단계였기에 혼자서는 잘 안 먹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처음엔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식당에 도착했을 때 들은 말들이 비수처럼 꽂혔다. 하나의 생명이 근고기, 백돼지, 흑돼지, 그런 단어로 분류되고 부위별로 조각나 불려지는 광경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제와서야 그런 표현들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어쩐지 조금밖에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점심때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면서 해안 끝에서 연기를 뿜어대는 화력발전소에 대한 비판이 오갔었다. 그 비판의 중요한 근거가 경관을 해친다는 점으로 일축되기도 했다. 그저 털색이 다를 뿐인 돼지들이 맛조차 다른 식품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주는 불편함과 환경파괴에 대한 비판이 심미적인 문제로 모아지는 순간이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같은 시선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조금쯤은 줄여나가면서, 덜 유해한 동물로 살아갈 수 있겠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조금씩 노력해보고 싶다. 소극적이었던 지금까지 보다 좀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싶어졌다. 많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나의 일상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난조


가족들을 배웅하고 앓아누웠다. 이틀간 많이 이동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달거리까지 겹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씻고 눕긴 했는데 무슨 정신으로 씻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날도 잔뜩 흐리고 비도 오고 추웠다. 두통이 생길 정도로 잠을 잤지만 생리통도 심하고 식욕마저 잃은 상태라 가만히 누워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누워 있는 내내 엄마의 뒷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어젯밤 옷상자를 정리해주던 엄마, 새벽 4시에 깨어난 딸이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들던 엄마, 아프다며 아침 산책도 취소해버린 딸을 위해 방청소를 해주던 엄마... 엄마는 그런 모든 일들을 기쁘게 했다. 엎드려서 엄마에게 그랬다.


내가 생각보다 잘 지내서 좀 그랬지, 엄마 없이도 혼자 잘 지내는 것 같아 좀 그랬지?

그런데 나는 혼자 등에 파스를 붙이다가 엄마에게 붙여달라고 하고 싶었고 청소할 때 편하라고 여기까지 밀대를 가져다준다는 엄마를 기다렸어.


내 말에 엄마는 웃었었다. 나는 혼자 남았고 고요 속에서 진통제를 먹고 누워있다. 나를 꼭 안아주고 서울로 돌아가던 엄마의 뒷모습이 아른거려서 함께 수목원을 걷는 나와 엄마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결국 그리움에 조금 울어버린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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