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밥심
가족들이 돌아가고 몸이 안 좋아서 계속 누워있다시피 했다. 하지만 누워있기만 하면 있던 힘도 사라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힘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조금쯤 움직이고 무언가에 집중할 때 회복되는 것 같다. 일어나서 방을 왔다 갔다 하기만 해도 누워있을 때보다는 나은 듯하고, 스트레칭을 하니 찌뿌둥한 몸이 풀려서 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교환학생 시절 외국에서 혼자 살았을 때도 그랬다. 작은 부엌이 그렇게 좋았다. 동네를 가로질러 장을 보러 가고 익숙해진 마트를 같은 동선으로 한 바퀴 돌고 비슷한 식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작은 냉장고를 채워 넣고 기지개를 한 번 한 후 갓 사온 신선한 재료로 간단한 요리를 해서 배를 채우는 일.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가끔은 수육이나 전 같은 요리다운 요리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는데 쉽지도 않아서 가끔은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령 한 번은 냄비를 태웠고 한 번은 전 부치다가 연기가 나서 내 방의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당황해서 의자에 올라 화재경보기의 수동 장치를 눌러 경보를 해제하고 내려왔을 때 잠시 멍하니 서 있기도 했었다.
그런 나날들이 가장 좋았다. 유럽 여행보다도 그런 시간들이, 그 작은 부엌에서 보낸 시간들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1년에 한 번 라면을 먹을까 말까 한 나인데도 아프니까 라면 국물이 생각나고, 식사를 맛있게 챙겨 먹어도 쌀을 먹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아서 밥알을 씹지 않고는 이틀을 넘기지 못하며, 간장과 참기름 없이는 요리를 하지 못하고, 된장찌개, 김치찌개, 고추장찌개를 돌려먹을 때 행복해하는 걸 보면 나는 분명 한국인이라는 것을.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 말이다. 매운 것도 떡볶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평생 먹은 떡볶이보다 더 많은 양의 떡볶이를 외국에서 해먹은 것도 내 식문화적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지금도 그렇다. 하루만의 첫 식사를 하면서 한국인은 밥심이다, 라고 중얼거렸다. 빵을 사 올 기력도 없고 아침에 비가 오기도 했고 샐러드를 먹자니 생야채가 소화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작정 냉장고의 야채를 털어 끓였다. 야채찜과 치아바타의 합이 좋아서 빵을 사러 나갈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피곤해서 그냥 야채찜만 먹었다. 우습게도 쌀은커녕 빵 한 조각 씹지 못했는데 밥심의 중요성을 느꼈다. 먹겠다고 다시 작정을 하니 대충 차리다가도 의욕이 생겨났고 결과물은 냄비 그대로 퍼먹는 밍밍한 야채찜이지만 먹고 나니 더 먹을 힘이 생겼다. 밥심이란 밥을 먹었을 때는 다른 일을 할 힘이 되고 밥을 먹지 않았을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먹을 힘을 주는 것인가 보다.
한때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절식을 하면서 많이 아팠고 회복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그 이후로 자극적인 음식을 더 못 먹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잃어버린 건 욕망이었다. 밥심을 잃으면 어떤 욕망도 욕구도 스러진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자야지. 앞으로도 그래야지.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