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차 : 서귀포에도 눈이, 범섬이 사라졌다, 경이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서귀포에도 눈이


여기는 눈이 잘 오지 않고 쌓이는 일은 정말 드물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눈이 와서 아주 조금이지만 눈이 쌓였다. 서울에서 보던 것처럼 함박눈이 펑펑 온 것이 아니라 가루 같은 눈이 알알이 내렸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굴러다니는 게 보여서 신기했다.

눈을 볼 때마다 항상 조금 설렌다. 어릴 때 살던 지역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아서 성탄절이나 새해, 설, 내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눈이 오면 엄청난 선물처럼 여겨졌다. 비록 내 생일에 눈이 온 적은 없지만, 겨울에 한두 번 눈이 와서 쌓이기라도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와 옥외 주차장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발자국을 남기고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차가운 눈을 쥐어보곤 했다. 어린 내 눈에 눈 쌓인 동네는 마치 축제날 같았다. 서울에 오고서는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던 눈을 매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눈이 오면 설렌다. 눈이 쌓이다 못해 얼어붙거나 녹아내려 진창이 된 길을 걷는 일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면서도 설렘이 먼저였다. 눈더미에 반사된 빛무리에 백야처럼 밝아진 밤에 뛰쳐나가 눈을 맞고 사진을 찍었던 때가 떠오른다. 아직은 눈이 반갑고 좋기만 한 아이 같은 내 모습이 예쁜 추억으로 남아있다.


눈 오는 날이어서 그런지 바람이 너무 많이 불고 춥긴 하다. 서귀포는 우리나라에서 겨울이 가장 먼저 떠나가는 곳이라 이제 봄이 오겠구나 하고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한 주 내내 겨울이 창밖을 두드린다. 그렇다면 담요로 몸을 싸매고 방에 틀어박혀 귤을 까먹으며 창밖을 봐주는 게 도리 아닐까?


내일은 서울로 간다. 다녀오면 정말로 봄이 오겠지? 눈처럼 녹아 사라질 시간들을 어떻게든 붙들고 싶어서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다.



범섬이 사라졌다


사실 창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범섬이 일출 이후로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가 뜨자 갑자기 다시 눈이 내리더니 하늘과 바다가 뿌연 안개 너머로 사라졌고, 범섬 역시 그림자처럼 희미해지더니 이내 안갯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낮이 되자 여전히 흐리긴 했지만 범섬이 다시 선명해졌다. 사라진 범섬은 떠오르는 해와 구름이 만들어낸 마술적인 쇼였을까? 범섬이 사라지자 솔직히 좀 무서웠다. 섬뜩함도 있었다. 내일 비행은 문제없겠지? 그런 현실적인 고민도 되었다.


마른 하늘에 눈이 내리고 안개가 끼고 다시 걷히고 하는 그 모든 하늘의 변화가 기이하고 아름답다. 참 신기하게도 눈이 오면 오히려 세상이 맑아져 간다. 더 흐려지지 않고 맑아지는데 눈발은 거세어질 때면 정말 홀린 것 같다. 희미했던 섬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는 걸 보면서 짐을 쌌다.



경이

저녁이 되니 완전히 날이 풀리고 하늘이 푸르러졌다. 잠깐 나갔다가 구름이 너무 그림 같아서 잠시 걸었다. 꼭 유화를 보는 듯했는데 유화 특유의 질감을 살려 저 하늘 같은 풍경을 표현해낸 화가들이 대단한 건지, 다양한 재질로 드러나는 자연의 변화무쌍함이 대단한 건지 헷갈린다.


날이 추웠지만 여전히 나는 홀린 기분이라 얇은 옷자락을 여미며 걷고 또 걸었다. 바닷가를 걸을 때면 세상이 온통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일출보다 일몰 보기가 더 어려운 동네이고 내 생활 패턴도 그래서 간만에 붉어진 하늘을 보니 어딘가 생경했다. 도시에서는 일출이 잘 보이지 않아서 일몰에 감격하곤 했는데 여기서는 매일 붉은 점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일몰은 잘 보지 못했다. 해가 넘어가긴 해도 주황빛으로 하늘이 물들기도 전에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밤이 오는 생경한 방식이 신기했다.



뜨는 해나 지는 해나 다 같은 해이고 사실 해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기도 한데 우리가 일출과 일몰에 의미를 다르게 부여하는 건 왜일까?

언제부터 나는 의미 부여에 집착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었을까?

무엇이든 의미를 붙이고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그런 자기중심성이 오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가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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