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차 : 해와 달, 할 거야, 마음의 무게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산책

해와 달


해와 달이 만날 수 없다고 누가 그래? 나는 검푸른 하늘이 산호빛으로 밝아오다 옅은 푸른색이 되는 걸 봤고, 노란 달이 창백하게 바래지는 걸 봤고, 새벽빛이 붉은 해와 함께 갈무리되는 걸 봤어.

붉은 해가 노란빛이 되어가는 동안 창백해지는 달도 함께 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들은 떠오르고 지고 그 사이에서 같은 하늘에 머무른다. 그렇게 서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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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어둠 속에 눈을 떠 요가를 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잠시 생각해보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어슴푸레한 새벽을 달리다가 붉은 해가 떠오르는 걸 보고 걸음을 돌렸다. 새로이 시작된 아침 해를 등지고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달리는 건 이렇게 멋진 일이라고 범섬과 새들에게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뭐든 반반이 좋다. 환절기, 썰물과 밀물이 있는 해안, 아침과 밤 사이의 새벽, 그런 지나가는 길목들이 좋다. 그 길목에는 둘 다 존재하고 무엇하나 지워지지 않는다.



할 거야(해야 한다 X)


요가를 하면서 하루를 계획하곤 한다. 오늘은 달리기를 하고 소설도 읽고 건강한 식사를 할 거야. 글도 좀 쓰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 안 해도 그만인 일들로 하루를 채울 거야. 누워서 속삭였던 혼잣말들을 오늘도 다 이루었다.


오래도록 해야 한다는 말에 붙들려 살았다. 불과 한두 달 전의 달력을 보면 서른 개의 네모난 칸들이 색색깔의 할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모든 걸 다 하고 살았다. 마감에 맞춰 일을 할 줄을 몰라서 나만의 마감을 만들곤 했다. 그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이라고 자부하기도 했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실제 마감보다 최소한 하루 이틀은 빠르게 모든 과업을 마쳐야 불안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해낼 수 없는 계획을 세워서 매일 밤 조정하고 또 조정하곤 했다. 그렇게 해야 하루 이틀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나는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고 미루는 게으름뱅이가 되었고 매번 빠르게 일을 마치면서도 자책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겉으로 볼 때 나는 늘 빨리, 많이 일하는 기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날 보며 사람들은 성실하다고 해주었지만 나는 그 성실하다는 말이 언제나 무거웠다. 점점 마감에 맞춰서 무언가를 하는 것조차 불성실한 범주로 생각되었고 나는 '성실한 나'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더 빨리, 더 많이 해내야 했다. 나만의 마감은 점점 앞당겨졌고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은 늘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많이 미루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자책하고 힘들어하면서 나는 계속 성실한 사람일 수 있었다. 점점 사람들은 내가 시간이 많고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들이 쉴 때 일하고 공부했는데. 이를 악물고 빨리 하려고 애썼는데. 그 모든 노력이 사람들의 칭찬 앞에서 오히려 지워지는 기분이 무엇인지 누가 알까? 사람들은 나는 남들보다 적은 시간, 적은 노력을 투자해도 괜찮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머리가 좋지도 않고 요령이 있지도 않다. 그저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성실하고 머리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바보일 뿐이었다.


결국 남은 건 나도 필사적이라는 것, 힘들고, 어렵고, 아프다는 걸 말하지 못해서 속으로만 곪아가는 마음뿐이었다. 힘들다, 어렵다, 그런 토로도 내 입에서 나오면 잘난 척이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아 말하지 못했던 날들. 점점 나를 걱정하지 않던 사람들.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늘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칭찬의 말들, 격려의 말들이 내게는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나는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남들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마음도, 나도 그저 아프고 힘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이해받고 싶은 마음도 포기하지 못하고서 아무도 모르는 병을 홀로 앓았다.


그래서 나는 '해야 한다'라는 의무와 강제의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하고 싶다', '할 거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서 여유를 찾아나가기 시작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조금씩 구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도 좋고 시간이 많아서, 넘치게 받은 귤들을 하나하나 까서 보관하고 얼어붙은 야채를 정리하고 방을 새로 꾸몄다. 그러고 좀 쉬면서 방 밖을 봤는데 오늘따라 물결이 반짝거려서 꼭 저녁 산책을 나갈 거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저녁까지도 바뀌지 않아서 예정대로 산책을 나갔다. 나가보니 생각보다 더 신나서 바다를 옆에 끼고서 한참을 걸었다.


매일 같은 길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 속에서 매일매일이 새로운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늘 같은 바다를 보다 보니 단조롭고 지루한 감정을 느껴 쉽게 우울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속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가 바닷가는 지루하다고 했지? 바람도 햇살도 물결도 파도소리도 모두 매일매일 다른데.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내일은 장을 보러 갈 거다. 읍내라고 해야 할까, 마트 가는 길에 마을 강아지들과 마주치면 좋겠다.



마음의 무게


산책을 하다 보면 돌탑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에 가면 사람들이 쌓아둔 돌탑이 아주 많다. 사실 나도 저번에 반질반질하고 예쁜 돌을 어렵게 골라 돌탑들 옆 살짝 패인 바위틈에 올려두었었다. 바람에도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을 것 같은 자리였다. 하지만 다음날 가보니 찾을 수가 없었다.


사라진 내 돌처럼 그 많던 돌탑들도 무너진다. 한동안 비바람이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기후에 시달리면서 돌탑은 매번 무너지고 또 세워지고 다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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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무너지는 돌탑에 씁쓸해하다가 도로시가 떠올랐다. 폭풍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폭풍 덕에 오즈로 가게 된 도로시. 사람들이 때론 무겁고 때론 가벼운 기원을 담아 올린 돌탑도 그 기원의 무게만큼 흔들리지 않다가 어느 순간 힘을 다해 바람에 몸을 싣고 오즈 같은 곳으로 떠나는 게 아닐까? 기원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닿는 건 아닐까? 적어도 돌에 담겼던 그 마음들은 바람에 실릴 정도로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이 덜어놓고 간 마음들이, 소망이 닿아야 하는 곳에 닿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해안을 찾아와 돌탑을 쌓고 떠난 사람들이 조금쯤은 가볍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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