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차 : 뚜벅이, 벽 없는 집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뚜벅이


사전투표를 하러 왕복 100분을 걸어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대륜동에 다녀왔다. 가는 버스가 없는 건 아닌데 어차피 정류장까지 15분 걸어야 하고 내려서 또 10분 걸어야 해서 그냥 운동 겸 걸어 다니곤 한다. 동마다 두세 개의 사전투표소가 있던 도시, 어디서든 눈에 띄는 곳에서 투표를 할 수 있었던 도시, 그런 서울의 조건이 당연하지 않음을 조금씩 배운다. 사전투표소가 많지도 않은데 사전투표를 하는 인원이 몰리지 않는다. 투표소가 그렇게 많아도 관외 투표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던 서울의 풍경과 너무 달랐다.

오랜만에 멀리 나간 김에 그쪽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왔다. 그래도, 귀찮고 다리가 아프지만, 미세먼지가 가득한 나라에서 무의미한 전쟁으로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되는 이 세계에서 내 몸과 시간으로 자원을 아주 조금이라도 대체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 아닌지. 그런 생각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과일을 고르면서도 제주나 서귀포산 과일인지 확인했다. 적어도 국내산, 정 안 되면 가까운 나라에서 수입된 과일이어야 한다고 기준을 세웠다. 아침에 소화가 빠른 바나나가 좋다고 해서 바나나를 살 생각으로 갔는데 먼 곳에서 수입된 과일이라 살지 말지 아주 오래 고민했다. 사오고서 후회했으니 다음번엔 사지 않을 생각이다.

동물복지계란을 사려고 하니 그 많은 상품 속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로 줄었다. 1인 가구에게는 다소 많은 양이라 열심히 먹겠다는 다짐을 하며 사야 했지만 이걸 사러 동네 마트가 아닌 큰 마트에 왔으니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카트에 계란을 담았다. 벼르고 벼르던 다진 마늘도 샀다. 마늘이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해지는 게 나는 분명 한국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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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만 담은 짐을 들고 돌아가는 길, 미리 눈여겨봐 둔 버스정류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제주도 전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대문인 정낭의 생김새를 따온 의자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벽 없는 집


해안산책로를 거쳐 산책하듯 시내로 향했던 터라, 바닷가에서 아침 식사 중인 듯한 새 한 마리를 보았다. 하얀 몸집에 유난히 길고 가느다란 다리, 끝부분이 짙은 회색 날개. 저 큰 새는 항상 같은 자리에 혼자 있다. 물론 매번 같은 새가 맞는지 알 길이 없지만 우리가 생활범위 내에서 주로 살아가듯 새에게도 자기만의 범위가 있지 않을까? 긴 다리를 뻗으며 걷고 마찬가지로 긴 목을 빼고 넣고 하는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아하다.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를 때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20220304%EF%BC%BF091900.jpg?type=w773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 새는 왜가리인 듯하다. 어느 날 성내천 근처에서 매우 닮은 새를 마주치곤 찾아보았다.


오늘은 대기 상태가 다소 좋지 않은 날이라 산책을 마치고는 씻고 집안에 틀어박혔다. 이렇게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면 나는 창을 굳게 닫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려오는 목과 말라붙거나 콧물 범벅이 되는 코에 따뜻한 물과 습기를 공급하며 우울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오늘 만난 그 새처럼 저 바깥이 집인 바다새들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미세먼지를 조금이라도 피할 닫힌 집이 없는데.

추위나 더위, 굶주림, 갈증 같은 자연의 섭리는 내 시선에서 판단할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 저들이 경험하는 추위, 더위, 굶주림, 갈증, 그리고 질병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여전히 내가 판단할 영역은 아니지만 미세먼지나 기상이변 같은 차원에서 우리는 이어져 있다. 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런 위기를 함께 겪고 있고 인간보다 더 취약하다. 그러므로 다른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주 이기적인 침입자들에게 너무나 너그러운 저들을, 손 놓고 잃어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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