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2분 30초
오늘도 좀 기분 나쁜 꿈을 꿨지만 잠자리가 사나울 정도의 악몽은 아니었다. 그래도 수면시간은 늘어서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무척 배고파하며 깼다. 간혹 처방약을 감량할 때 금단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딱히 그 정도의 어려움은 없이 잘 헤쳐나가고 있다.
기분도 좋고 새벽 공기가 맑길래 신나서 뛰러 나갔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체력이 달리는지를. 지금껏 악쓰듯이라도 노래를 불러대며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딱 거기까지는 할만했던 것뿐이다. 달리기는 만만하지 않아, 노래는 무슨. 런데이 어플에서 제공하는 8주 코스에서 3분 정도 구간이 대다수가 호소하는 고비라더니 진짜인 모양이다. 2분 30초씩 끊어 뛰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마지막 달리기 때는 거의 멈추지만 말자는 마음으로 기어가듯 달려야 했다. 페이스 관리고 뭐고 미쳤구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2분 30초가 달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인데, 그 달리기 사이의 걷기 구간에서 2분은 왜 그렇게 짧은지? 심호흡을 거듭하다가 억 소리를 내며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오늘 바람도 세서 맞바람 탓에 페이스를 높일 수조차 없고 몸이 흔들렸다. 휴식이나 다름없는 걷기 구간 2분보다 더 긴 시간을 계속 달려야 하는데 앞으로 버틸 수 있을까? 이게 하면 느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 되면 오늘 코스를 반복해야 하겠지만.
돌아와 보니 맑았던 공기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는지 어느새 미세먼지 농도가 또 최악을 찍었다. 그래도 서울에서처럼 공기에서 탁하고 녹슨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법환포구보다 배가 많이 다니는 듯한 강정포구 쪽이 기준 측정소라 서귀포 치고는 오염도가 심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선박 매연이 생각보다 심하다는데, 무엇 하나 우리는 해 끼치지 않는 일이 없구나. 반대쪽 측정소는 외돌개 방면으로 비교적 관광지 부근인 것 같던데 거긴 보통 수준이니, 우리 동네도 그곳처럼 좀 덜하다고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오늘은 자욱한 안개 대신 구름이 왔으니까.
흰머리
미세먼지가 싫어서 집안에 있게 된 김에 방 정리를 좀 했다. 내 방에서 가장 부산스러운 공간은 사용하지 않는 티브이 아래에 설치된 작은 선반 쪽이다.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정리를 해도 어수선하다. 바닥에도 무릎보호대니 뭐니 운동을 위한 온갖 것들이 정리되어 있다. 겉보기엔 그냥 던져둔 것 같아도 나름대로 정리해서 놓아둔 것이다. 그것도 열심히.
방청소를 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역시 머리카락이다. 내가 탈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머리카락을 잔뜩 모으면 그걸로 빗자루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펌을 하지 않으면 관리가 안 되는 반곱슬만 아니었어도 아무런 약품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기부했을 텐데 늘 아쉽다. 아무튼 먼지보다도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바닥청소를 자주 해줘야 한다.
청소를 하다 하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발견했다. 문득 지난 학기말에 반짝이는 새치들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 때부터 새치가 나긴 했고 아빠도 어릴 때 그러셨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지난 학기말에 거울 속에서 발견한 새치는 한두 가닥이 아니었다. 불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뽑느라 한참 거울 앞에 서 있다가 생각했다. 그랬구나, 내가 이 정도로... 그랬던 그 순간.
이제는 거울을 보며 열심히 뒤져도 새치가 발견되는 일은 드물다. 아주 오랜만에 발견한 새치 한 가닥. 그것도 자연스럽게 빠졌다.
오늘은 지난날들과 달리 그렇구나, 내가 이 정도로 좋아졌구나. 했다.
육지사람
나가기 싫었지만 점심때에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했다. 제주 삼춘네 아들들 학업상담을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삼춘이 맛있는 김밥을 무려 세 줄이나 사다주셨다. 친구분이 운영하는 곳에서 날 위해 받아왔다고 하셨다. 집에서 직접 담은 댕유자청도 한 병 가져다주셨다. 처음에 댕유자가 뭔지 몰라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제주도 토종 감귤인데, 이름과 달리 흔히 아는 유자와는 다르다고, 약이나 다름없다고 하셨다. 청을 좋아하고 몸에 좋은 건 더 좋아해서 정말 감사했다. 맛있으면 파는 곳을 찾아 서울 갈 때 사가야겠다 싶었다.
저번에 펜션 사장님도 그러셨고 삼춘도 그러시는 게 다들 제주와 서울의 교육 환경 비교를 넘어 아이들의 수준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셔서 놀랐다. 나도 대도시는 아닌 지방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환경적인 차이를 느끼긴 했지만 아이들의 평균치는 다르지 않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직접 교육을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내가 환경을 많이 타지 않는 편이고 학습에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편이라서 잘 못 느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환경이나 분위기라는 게 정말 중요한 거구나, 그래서 지역별로 차별화된 지원이 꼭 필요하구나 또 배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릴 때부터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자연스럽게 해왔던 아이들은 좀 부러웠다. 바다와 맞붙어 자랐다는 점이.
학업적인 교육 환경 측면을 제외하고는 삼춘은 이 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많이 보여주셨다. 대포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권해주시기까지 했다. 들으면서 계속 궁금했다. 섬에서 태어나 자란다는 건 어떤 걸까, 이방인이지만 내가 이 섬을 늘 그리워하고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삼고 싶어 했던 건 또 어떤 이유였을까. 삼춘이 내가 살던 곳을 '육지'라고 지칭하셨을 때 왜인지 묘했다.
육지사람은 섬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근본부터 다를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표현이었다.
다채로운
공기가 나쁜 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이왕 나와버린 김에 산책까지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엔 물이 발끝까지 차올랐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저 멀리 후퇴했다. 밀물과 썰물의 주기를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때그때 바위 해안의 풍경이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썰물의 정도에 따라 드러나는 바위의 색이 다르다는 점.
이번 썰물은 좀처럼 보기 힘든 하얀 바위들을 드러냈다. 여기 바위 해안의 짙은색의 바위들 사이로 하얗게 칠이 벗겨진 것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좀 있긴 하지만 그건 바다새들의 배설물에 덮여 그런 거라고 했다. 그 외에는 모두 검은 바위, 최소한 짙은 회색이다. 그러다 바다가 물러나면 그 아래 녹색 이끼 낀 검은 바위들이 드러나고, 이번 썰물처럼 아주 멀리, 마치 범섬까지 길을 열 태세로 바다가 물러나면 온통 하얀 바위들이 바다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삼색 줄을 이룬 바위들, 그리고 그냥 파랑보다는 너무 짙고 남색보다는 밝은 빛깔의 바다. 그 너머의 범섬과 말 그대로 하늘의 색, 하늘색은 영어로도 skyblue여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당장 떠오르지 않는 옅은 빛깔과 하얀 구름 조각의 뒤섞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