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차 : 아침마당, 경이로운 한기, 파랑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아침마당

어제 과외가 밤늦게 끝나서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지만 잘 잤다. 꿈도 불쾌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쉽게 잊었다. 꿈이 흐려지는 동안 더러운 것들도 흘려보내며 빨래를 했다. 흰 양말만 신다가 운동용 회색 양말을 같이 빨아보니 흰 양말은 정말 노동의 보람이 적은 놈이다. 엄마 미안했어. 그래도 앞으로는 회색 양말을 많이 신을 것 같아.


물 뜨러 나갔다가 마당에서 우아하고 날렵한 몸을 가진 검은 대형견에게 일방적인 인사도 받았다. 어찌나 활발한지 사람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이른 아침이고 펜션 마당이라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목줄을 잠깐 푸셨던 모양이던데 동물을 무서워하거나 알레르기가 심한 사람과 마주쳤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목줄을 잊지 않고 꼭 해야지, 꼼이를 떠올리며 스스로 다짐했다. 아무튼 나야 큰 개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저 귀엽고 좋았다. 꼼이가 그립기도 했다.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꼼이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나는 꼼이를 보지만 꼼이는 화면 속의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꼼이가 나를 그리워했으면 하면서도 그냥 이대로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마음이 교차한다.


오늘 아침은 무언가 평소보다 더 상쾌하고 여유롭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빨래를 할까, 하고 의욕이 넘치는 날. 어떤 것이든 의욕이 넘친다는 건 멋진 일이다.



경이로운 한기


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꽃샘추위라기엔 바람과 꽃이 너무 잘 어우러져 논다. 봄이 와도 바람은 이 해안을 떠나지 않고 꽃들은 그런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다. 살랑살랑 오히려 더 아름답게 춤을 춘다. 그럼에도 겨울의 것도 봄의 것도 아닌 모호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이다. 나는 그렇게 한기가 스미는 느낌이 좋다. 어떤 아픔이나 고통은 즐거울 수도 있음을 알아간다. 내 뼈와 살을 깎아내고 닦아내며 새로워지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1652418830584.jpg?type=w773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그 사실에 집중할 때 그 경이로움에 들뜨게 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당연한 움직임이 내가 한없이 가라앉고 있을 때도 이루어져 왔다는 깨달음이 살아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생각함도 불길한 일이 아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그 감각을 기억함으로써, 이런 삶과 저런 삶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괴로움을 죽음을 향하는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수 있겠지.


꼭, 살아남을 것이다. 오늘도 다짐했다.



파랑

엉망으로 솟구친 머리카락을 보면 정지된 사진에서도 바람을 볼 수 있다. 바람이라고만 부르면 부족할 정도로 강한 돌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위이잉 우우우우위이이윙 하는 바람 소리가 집안까지 들어찼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도 집까지 스며든다. 마치 발밑에서 넘실거리던 파도가 집에 찾아온 듯. 사진에 바람을 담을 수 있는 이 마을이 좋다.


오늘 바다 빛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짙다.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다.

그래서 흰 파도가 더욱 힘차고 아름답다.

꼭 바다가 살아 있는 것 같다. 넘실대는 바다의 혓바닥을 밟고 물에 잠긴 길 위에 서고 싶어 진다.

아직은 겁이 많아 가지 못한 길.

20220306%EF%BC%BF102924.jpg?type=w773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0일 차 : 2분 30초, 육지사람, 다채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