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차 : 온몸, 귤맛, 이끼 낀 지구, 일'몰'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온몸


왜 온몸으로 부딪히는 문학을 사랑하는지 궁금했다. 왜 문학인들은 부서지고 파열하는 몸을 사랑하는지, 왜 나는 계속해서 여성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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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오는 시간에 달리기를 끝내고 아침과 함께 집에 돌아올 때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걸었다. 원래도 익숙하고 안전한 길에서 눈을 감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혹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며 걷기도 했다. 발밑을 살피지 않고 앞을 보지 않고 걸으면 왜인지 좋았다. 비틀거리는 감각도 좋았다.

운동을 하고서 눈을 감거나 고개를 젖히고 걸어보니 이유를 알겠더라. 눈을 감으면 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어떤 부위가 꿈틀거리고 어디가 시큰거리는지 알 수가 있었다. 몸이 커다란 덩어리가 아니라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진 복잡한 물질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밉고 무겁고 불편했던 내 몸 구석구석을 조각내어 감각하다 보면 오히려 몸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 든다. 원하는 대로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고 손가락 마디마디 힘을 주어 부서지는 빛을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몸 안팎을 다 들여다보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어쩌면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는 길이기에 수많은 문학인들은 몸을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뻔히 보이는 것을 지워내야 드러나는 무언가를 감각하고 온몸으로 그들을 지키고 밀고 나가는 삶의 방식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복근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다. 등에 많은 것을 지고 가슴에 많은 것을 품기 위해서. 아직은 비루한 이 몸이 더 오래 달릴 수 있도록.



귤맛


어제 자주 가는 빵집에 또 들렀었는데 빵이 늦게 나와서 치아바타를 사지 못했다. 대신 궁금해하던 마늘 포카치아를 샀다. 하루 지난 빵을 저렴하게 파는 알뜰빵 칸에 있었는데, 포카치아가 남아 있는 일은 정말 드문데 잘 됐다 싶었다.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오자마자 식욕이 돌아 얼른 포카치아를 데웠다. 건강한 마늘맛 토마토 피자 같은 맛이다. 고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맛이다.


쌀식빵도 사 와서 얼려두었다. 양배추찜을 해서 같이 먹을 예정이다. 벌써 군침이 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따뜻한 물로 씻고, 데운 빵을 먹을 수 있음에 오늘도 감사한다.



이끼 낀 지구


어제까지는 바다였던 바윗길이 다시 드러났다. 아직도 젖어있는 이끼가 선명한 빛으로 살아있다. 이끼는 처음으로 바다 밖으로 나온 식물이라고 했다. 바다에서 태어난 푸른 생명이 육지로 나오고서야 지구는 우리가 아는 '푸른 별'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지구과학은 중학생 때부터 내겐 수면제였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지구과학 관련 교양은 낮잠 자는 시간이었다. 커다란 강의실에서 졸고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푹 자고 눈을 뜨면 어느새 마칠 시간이 되어 있던 날들. 4연강이라 힘들었던 그 시절 소중한 낮잠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잠들지 않고 눈을 빛내며 집중하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다큐 보는 날이다. 특히 지구가 가스별에서 산소별이 되고 푸른 생명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건너오는 그 순간, 실제로는 억겁의 시간이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찰나처럼 보이는 그 역사적인 사건 발생에 대한 과학자들의 각색은 한 편의 희곡과도 같았다. 경이로운 이야기였다. 어느 다큐의 마지막 장면에서 꼼지락대던 아기의 손가락을 기억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지상에 올라온 움직이는 생명체가 마침내 갈라진 발을 갖게 되었을 때 인간의 다섯 손가락이 태동했다는 그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경이로운 역사를 알게 될수록, 주변에 남아있는 경이를 목격할수록 불안해진다. 그 길었던 창조적 진화의 시간에 비할 수도 없는 아주 짧은 시간만에 지구는 다시 가스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끔찍하게도.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펼쳐진 내 손바닥이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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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이 해안에서는 낮 동안의 태양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지켜볼 수 있다. 마치 바다에서 건져 올려지듯 왼편에서부터 떠오르는 붉은 공은 점차 너무 밝아 맨눈으로는 응시할 수 없는 노란빛을 내며 머리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산호빛으로 물들이며 오른편으로 저물어간다.

일몰이 더 아름답고 일출은 관찰하기가 어려운 동네인데도 그 드문 일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땅의 실루엣 속에 사람들을 파묻고 사진 속에서만큼은 오직 지는 해와 바다, 그리고 검은 바위만을 담는다.


해가 떠오를 때는 동물의 그림자가, 해가 질 때는 자연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그래서 일'몰'인지도 모른다. 매일의 일출에 감사하면서 매일의 일몰에는 모든 것을 지우려 한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근본은 같은 마음이다.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싶을 때면 일몰을 본다. 그리고 긴 밤을 지나 다시 해가 떠오르면 눈부신 빛무리를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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